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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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register_magnify_027.jpg | 조회수 | 2,525 |
「김삼웅의 『장일순 평전』(두레, 2019)에 대한 서평」 참사람 의 길(眞人之道)
< 이 글은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발간하는『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들어가며 무위당 장일순(張壹淳; 1928~1994) 선생이 그렸던 이상적인 인간은 아마도 ‘참사람(眞人)’이었던 듯하다. 교육가로서 학생들에게 ‘참되자!’를 가슴에 새기도록 하고, 사회운동가로서 ‘참사람은 사심이 없다(眞人無私心)’는 것을 늘 강조하며, 아래로 흐르고, 고개를 숙이며, 엎드리고, 기어살기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장일순 평전』의 저자 김삼웅 선생(이하, 김삼웅 또는 저자) 역시 장일순 선생의 ‘참됨’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저자는 장일순 선생을 초월적인 성자도, 비범한 도사도, 고매한 성직자도 아닌 평범한 이웃이고, 생활인 이었다1)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장일순 선생을 소박하거나 어눌하다는 경박스런 표현으로는 수식하지 않는다. 대신에 술이부작(述而不作)으로서 예부터 전해오던 말을 옮기며, 그 이상의 말을 지어내지 않는데, 그 말은 조선후기 학자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말이었다.
“문장보다 귀한 것은 몸을 지키는 위엄을 갖추는 데 있다. 지위가 낮아 미천하고 문장도 별반 놀랄 만한 것이 없는데도, 가는 곳마다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지위가 위세당당하고 문장도 화려함을 갖추었는데도, 가는 곳마다 능멸과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 어째서 그러겠는가.”2)
높은 관직에 오른 적도 없고, 자신의 생각을 녹여낸 글 한권 쓴 적이 없는데도, 장일순 선생은 가는 곳마다 존경 받고, 또한 영면한지도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를 따르는 사람은 늘어가기만 하고 있다. 이렇듯 위의 인용문은 바로 선생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정직함, 엄격성, 장렬함, 청렬함이라는 말로 풀어내지만, 결국 이러한 말들은 ‘참됨’으로 귀결된다. 김삼웅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았던 선생의 내력을 ‘참됨’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이관지(一以貫之)’로서 그려간다. 『장일순 평전』은 이제 출간된 지 채 세 달이 되지 않았다. 물론 저자가 온라인매체를 통해 그동안 꾸준히 연재해 온 결과의 산물이겠지만, 이 평전은 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을 추천하는 말로서 이철수 화백은 탈고한 저자에게 감사와 축하를 전하며, 무위당 선생의 평전 작업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는 내용을 언급한 것에서 미루어 짐작된다. 그 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부담감도 컸을 것 같다. 얼마 전 원주에서 열린 무위당 서거 25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한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출간된 김삼웅의 『장일순 평전』은 많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작품이라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평가해본다.
한국 현대사 인물에 대한 평전 전문가로서 그는 한국의 굴곡진 현대 역사 속에서 있었던 사건과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선생을 조망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수많은 자료와 사건들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만큼, 무엇인가를 빼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의 선후관계, 전후맥락 역시 잘 그려야 하는데, 저자의 이번 작품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미 많은 평전 작업들 중 특히 ‘리영희’, ‘조봉암’ 등의 평전 작업을 통해 장일순 선생의 삶의 궤적을 간접적으로 살폈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어떤 인연도 없었던 점이 더 없이 그를 객관의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장일순 평전』은 사실에 근거한 직필(直筆)을 근본으로 담백한 필치를 기본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경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켰다. 예컨대, ‘사회대중당 창당선언문과 정강정책’, ‘영세중립화를 위한 통일안보’ 심지어는 장일순 선생 재판 공소장까지 다양한 사료와 자료들이 『장일순 평전』에는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이러한 공력은 장일순 선생을 신화의 인물이 아닌 시대의 인물로 드러나게 했다. 이러한 그의 필체는 마치 담담하게 펼쳐지는 ‘장일순 선생의 다큐멘터리’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우선 여느 평전작업이 그러하듯 저자의 『장일순 평전』은 기본적으로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로서 선생의 일생을 열 단계의 시기로 구분하여 시작한다.
“첫째, 미군 대령의 국립 서울대학 총장 부임에 반대 투쟁한 학창시절. 둘째, 혁신정당 후보로 총선에 나왔다가 실패한 시절. 셋째,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창했다가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투옥된 30대 시절. 넷째,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한 중년시절. 다섯째, 지학순 주교 등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한 시기. 여섯째,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와 민주인사들을 보호한 시기. 일곱째, 농민 노동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승화시킨 시기. 여덟째, 민주세력을 통일운동으로 결집한 민족통일국민연합을 결성한 시기. 아홉째,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한 시기. 열째, 본격적인 생명사상운동을 벌인 시기.”3)
무위당 선생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시기 구분을 날실로 삼고, 스무 개의 주제에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씨실로 촘촘히 잘 엮어서, 어느 곳 하나 성기거나 우는 곳 없이 잘 직조되어 있는 느낌이다. 무위당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 중에는 ‘원주천 둑방길에서 주워 핀 담배꽁초 이야기’라든지 ‘교사로서 스스로 매 맞은 사연’, ‘아내에 대한 일화’, 그리고 그가 우리 곁을 떠나던 마지막 장면까지 선생이 걸었던 다양한 삶의 조각들을 조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그 행간에 묻어있는 참사람의 걸었던 삶의 길이 보이고, 이내잔잔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김삼웅의 『장일순 평전』은 지금까지 출판되었던 작품들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한 가지 더 첨언하면 ‘무위당사람들’이 감수를 했다는 점이다. ‘무위당사람들’은 무위당 선생이 살아계셨을 적에는 선생과 함께 운동을 함께 펼쳤고, 선생이 곁을 떠난 이후에도 무위당 선생의 생각과 정신을 계승하며 공동체적 삶의 지향을 위해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의 단체이다. 그렇기에 『장일순 평전』에 대한 무위당사람들의 감수는 그 자체만으로 공신력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시민여상(視民如傷: 백성을 다친 사람 돌보듯 보라) 개인적으로 이 평전을 읽으며 새로 알게 된 것들도 많았다. 그 중에 하나는 장일순 선생이 국무총리직을 제안 받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설 무렵 이전 정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국정운영을 모색하고자 장일순 선생을 국무총리직 후보군에 넣고 실제로도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무위당 선생은 “웃으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했어. 나더러 구정물이 있는 썩은 웅덩이에 뛰어 들라고? 어림없는 소리 말아”4)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천하를 주겠다는 요임금의 부탁을 거절한 허유(許由)와 소부(巢父) 이야기와 이와 유사한 장자(莊子)의 진창 속의 돼지이야기를 꺼낸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장자의 이야기는 ‘사람은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해야)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한다(人怕出名 豬怕肥 - 인파출명 저파비)’라는 명언으로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원주시 중앙동에 위치한 무위당기념관에는 무위당 선생의 서화작품 몇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저파비(豬怕肥;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작품이다. 이어서 저자는 여기에 또 다른 일화 하나를 보탠다. 선거에 출마하고자 한다는 고향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장일순 선생은 그 자리에서 거침없이 서예 작품 하나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배고픈 사람 배불리 해주어라. 세금 조금 내보내라. 부역 없게 하라”젊은 시절 그는 약관의 나이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그런데 국무총리라는 높은 관직을 내던진 것은 조금은 의아스러웠다. 물론 시대 정황을 보더라도, 장일순 선생의 거절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보았던 지점은 대체 어디였을까? 장일순 선생이 말하는 “새롭고 자유롭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나라는”5)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앞의 이야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면, 적어도 내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회를 그렸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무위당 선생은 ‘시민여상(視民如傷)’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참고로 이 작품은 『장일순 평전』 내 수록된 50여개의 서화작품 중의 하나이다. ‘시민여상(視民如傷)’은 중국문헌인 『춘추좌전(春秋左傳)·애공(哀公) 원년(元年)』의 오(吳)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서 낀 진(陳)나라의 이야기와,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서 중국의 성왕(聖王)이었던 우왕과 탕왕 그리고 문왕을 그리는 맹자의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두 이야기의 요점은 ‘백성을 다친 사람 대하듯 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내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라’는 말일 것이다. 장일순 선생이 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말이 아니었을까.
무위(無爲)는 힘이 있는 자의 행위이듯이 시민여상(視民如傷) 역시 힘이 있는 자의 몫이다. 상대적으로 강한 자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이다. 두 달 넘게 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지금 우리의 국회가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특히나 지난 강원도 산불 피해에 대한 지원책은 여전히 진척이 없는 이 상황에서 내 이웃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는 이념과 정치적 노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젊은 시절 장일순 선생이 부르짖었던 “혁신정치”6)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전환과 각성 바로 우리 옆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 자들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각성과 성찰이다. 이를 통해 지금과는 다른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의 시도가 없지는 않다. 이른바 ‘경제대전환’이 그것이다. 앞으로 경제대전환을 이루겠다는 포부로 이제 위원회를 발족한 정도라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 내용이 각성과 성찰 보다는 비난과 비판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어 우려가 된다. 불과 10여 년 전에 너나할 것 없이 경제를 제일 먼저 외쳤던 지난 정치의 모습과 유사하고, 이것이 40여 년 전에 일었던 관제운동처럼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된다. 물론 저마다 나름의 공적이 있을 터이나 전환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인 맥락과 부합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내가 알기로, 전환의 외침은 1860년 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명 이후부터이다. 천지개벽, 후천개벽 등의 이른바 ‘개벽’을 향한 전환의 외침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모습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 개벽의 졸가리는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방향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상향식의 전환운동이다. 예컨대, 동학농민혁명, 3·1독립만세운동,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이 그러하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이러한 전환과 각성을 온몸으로 이야기하며 살았다. 한쪽에서는 물고기를 잡아서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일러주어야 한다는 정신7)으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비롯한 사회개혁운동에 투신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연대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면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면서, 화합과 협동의 논리라는 시각으로 봐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8)고 주장했다. 평전에는 이러한 단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장일순 선생의 생애에 있어 분명한 기점이 되는 시기를 1977년으로 꼽는다. 이 기점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이 결국에는 생명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위당 선생께서도 여러번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77년 이전과 달리 그 이후에는 생태와 생명 이야기가 전면적으로 대두된다. 더욱이 77년은 쌀의 완전 자급을 달성하게 된 상징적인 시기였다. 그래서 선생의 이 시기 주장은 ‘먹기 위한 문제’에서 ‘먹을 것에 대한 문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생명을 위해 생산성을 높이고자 무분별하게 사용했던 농약과 화학비료가 오히려 농민들과 이를 소비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각성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해월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이 ‘한살림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이며, 그 시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전환과 각성이었다. 여기에 생략된 이야기들은 모두 평전에 촘촘히 박혀있어 이를 발굴하고 가공하는 것은 독자의 즐거운 몫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 평전을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선생의 공생(共生; 共生是道)의 의미가 결국 ‘생활의 각성’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한살림선언」과 ‘한살림운동’에 아로새겨 있긴 하다. 그러나 먹을 것을 비롯한 생태와 환경에 대한 시민사회의 역할과 기능에 가려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 가운데 생명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그리고 사상적 의미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생명의 아버지’는 결국 ‘인내천(人乃天)’과 ‘향아설위(向我設位)’의 변주이다. 해월이 말했던 나를 향하여 신위(神位)를 베푼다는 ‘향아설위(向我設位)’는 그 종교성을 떠나서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기능한다. 이것은 분명 미묘한 지점으로 우리가 헛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회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거피취차(去彼取此)’처럼 이는 ‘자신에게 참되자’라는 각성과 성찰의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노래했던 윤동주의 심급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라고 인색하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최치원이나 원효 스님이나 이퇴계 선생이나 다양한 인물로 대표되어 지금까지도 표현되어 왔던 우리민족의 정신문화라고 거칠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장일순 선생에게는 ‘참되자’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다고 본다.
Ⅳ. 나오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서화작품 50점을 품고 있다. 작품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고,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있다고 전해오는데, 평전에서는 몇 편의 작품을 통해서 담긴 의미와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완지식 함천지인(一碗之食 含天地人)’이나 ‘서필어생(書必於生)’ 등과 같은 작품에 대한 내용은 다시 한 번 읽어볼 만하다. 특히 평전 내 256쪽 이후에는 25개의 작품이 연이어 수록되어 있다. 중생란(衆生蘭), 의인란(擬人蘭)이라 불리는 선생의 난초화 작품과 한글이나 한자로 풀어낸 선생의 서예 작품은 그 자체로 잠언으로서 충분하다. 작품의 내용을 정자(正字)로 다시 번각하고 해석한 내용이 작품 아래에 설명으로 대신하고 있어 작품을 감상하는데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점은 서예가로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잘 그려낸 이 책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의심을 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사용한 언어로 비롯된 것이었다. 장일순 선생에 대한 저자의 표현 중에서 “아나키스트의 담백함과 초연함은 계산을 모르는 철학자의 모습”9)이라고 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나키스트(anarchist, 무정부주의자)는 필자의 선입견으로는 장일순 선생과는 그다지 일치되지는 않았다. 1961년 5월 18일에 구속되어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위반으로 사상범이 되었던10) 장일순은 항소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장면에서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보았기에 아나키스트로서의 장일순은 부조화된 표현이라 생각했었다. 후에 저자 김삼웅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보니 그제야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저자는 “아니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권력, 무지배, 무독점, 무강권’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말한다.11) 곁에서 겪어보지 못하고, 자료로서 파악한 것이라 틀릴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는 장일순의 리더십이 앞에서 끄는 지도자라기보다는 뒤에서 미는 리더의 모습이 더 가깝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저자의 표현이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생각해보면 김우창 교수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과거는 오늘의 창조적 풍요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그것은 새로이 변용되어서만 살아남는 것이다. 다른 자연 세계의 지혜들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직까지 앞으로 심오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유산일 뿐이다.”12)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협동조합운동과 생명운동의 결과로 기인된 바가 크다. 그러나 김삼웅의 『장일순 평전』은 선생을 지금의 풍요 속에서 바라본 것이 아닌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도덕적인 순수성을 지키며 고결하게 살다”13)간 인물로 본 결과이다. 바로 ‘참사람이 살았던 길’을 그린 것이다. 당장에 우리 사회에서는 장일순의 사상과 정신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일이 없지 않다. 물론 그것이 새로이 변용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인물의 숙명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새롭고 자유롭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나라’는 내 이웃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사회이다. 바로 참사람들이 사는 그런 사회 말이다.
3) 김삼웅, 같은 책, 25-26쪽. 5) 같은 책, 70쪽.(여기에는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의 유인물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위 문구는 이 유인물의 문구의 일부이다.) 6) 같은 곳. 8) 같은 책, 155쪽. 10) 같은 책, 88쪽. 11)이명구, “역사공부의 목적은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김삼웅 전 독립기념관관정 ‘민족주의 폐기할 것인가, 살릴 것인가’”, 12) 김우창,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민음사, 2015, 5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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