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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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사회적경제이야기.jpg | 조회수 | 2,441 |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 오늘 나는,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 이야기가, 각자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회적 경제가 옳은지를 따지기 전에, 나는 이런 사회적 경제를 꿈꾼다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지난 7월 6일 제2회 대한민국 사회적경제 박람회에서「사회적 경제로 그리는 사회, 지향과 실천」을 주제로 열린‘한국 사회적경제 연대회의 포럼’ 발표문입니다. > 1. 지금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짧은 소감 (1) ‘해방적 관점’이 사라졌다 먼저, 지금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짧은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은 매우 다양합니다. 일찍이 장원봉 박사는 이를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회적 경제를 통해 시장사회의 대안이 마련될 것이라는 ‘해방적 관점’이 있습니다. 둘째로, 사회적 경제를 실업과 복지 문제 같은 국가와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으로 보는 ‘보완적 관점’이 있습니다. 셋째로,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가 결국은 공공부문의 민영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따라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상실될 것이라는 ‘비판적 관점’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이런 세 가지 관점이 어느 것이 옳으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융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해방적 관점에서 사회적 경제는 시장사회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길러야 하고, 보완적 관점에서 사회적 경제는 현실 가능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며, 비판적 관점에서 사회적 경제는 제도화 이후를 향해 부단히 혁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사회적 경제에는 해방적 관점이 빠진 채 보완적 관점만 팽배해 있습니다. 더욱이 보완의 내용이 대부분 국가 정책에 의해 규정당하고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이 보완의 전부인 양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보완이 쌓여 해방을 이룰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는 이런 사례를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해방적 관점에서 출발한 사회적 경제가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는 많이 봐왔어도, 보완적 관점에서 출발한 사회적 경제가 해방을 이루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경우는 보완으로서의 성과가 크면 클수록 국가와 시장에 수렴되기 일쑤입니다. 물론, 수렴이 반드시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회적 경제의 성과는 국가와 시장에 수렴돼 우리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켜가야 마땅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문제는 사실 그 다음에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의 성과가 국가와 시장에 수렴되어갈 때, 수렴되어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변화되어갈 때, 그 다음의 혁신적 대안을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해방적 관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해방적 관점에서 그 다음의 구체적 대안을 찾아야만 혁신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 즉 민주성·자율성·참여 민주주의의 상실은 따라서 국가나 시장보다 오히려 사회적 경제 진영 내부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정부나 기업이 사회적경제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지금은,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경제 내부에 해방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2) 우리의 ‘사회적 경제’가 없다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는 유럽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이런 유럽이 21세기의 전략적 모델로 사회적 경제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지만 나는, 유럽의 사회적 경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우리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 상황이 다르고 사회적 경제에 대한 요구 또한 다르니, 당연히 우리의 사회적 경제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유럽의 경우, 사회적 경제는 산업구조의 전환에 따른 실업 문제, 시장의 세계화에 따른 복지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재’등장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향하는 산업구조의 대전환, 재정급부형 복지에서 서비스제공형 복지로 향하는 복지의 대전환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가 재등장했습니다. 더욱이 유럽은 《시민의 참여→새로운 경제조직의 구축→시민적 공공성의 확보→(지역)사회의 창출》이라는 선순환 구조의 확립을 위해 사회적 경제를 숨은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선도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시민과 사회적 경제를 향해정치가 내려와 있습니다. 이와 비교해 우리의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이 고용의 위기를 낳지만, 동시에 고용된 적이 없거나 고용되지 못한 이들의 생존(노동)이 당면 과제입니다. 재정급부형 복지에서 서비스제공형 복지로의 전환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가 몰고 올 복지 수요에 대한 시급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수많은 사회적 경제조직들이 생겨났지만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고, 정부 정치와의 관계에서도 아직은 독립적이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사회적 경제는 고용의 위기와 동시에 생존(노동)의 위기, 복지 전환 이전에 복지 부재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 체력이 미약합니다. 사회적 경제는 어떤 사회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역할을 달리합니다. 유럽과 같은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실업·사회적 배제·복지국가의 위기에 대응하는 역할이 강조됩니다. 개발도상의 사회에서는 식량의 안정적 공급, 교육·건강·복지·주택 등과 같은 기본적인 필요에 대응하는 역할이 강조됩니다. 전체주의적 요소가 아직 남아 있는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시민 정신·민주주의·혁신적 기업가 정신을 제공하는 공급처로서 사회적 경제가 주목 받습니다. 이와 비교해 우리의 사회적 경제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와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생활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산업의 구조조정에 따른 새로운 직장이 아니라 생존(노동) 그 자체입니다. 유럽만큼 복지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로 더 빠르게 고령화되어가는 우리에게는, 시민에 의한 복지의 창출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종종 정책 동원으로 이용해온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경제를 통한 더 많은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율성의 고양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 만큼, 우리의 사회적 경제는 좀 더 복합적이고 다중적이면서 근본적일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적 경제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2.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에 대한 몇 가지 단상 (1) 사회적 경제의 출발 :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이야기하기 ‘근본적(radical)’이라는 것은 ‘급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생각이 근본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실천이 ‘통합적(integrated)’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이 근본적이라고 해서 그 실천이 급진적이어서는, 또 그 실천이 통합적이라고 해서 그 생각마저 중도적이어서는, 해방을 향한 꿈은 현실이 아닌 공상이 되어버립니다. 근본적 생각은 칸트가 이야기한 ‘상상’, 즉 감성과 오성의 뿌리이면서 동시에 이 둘을 종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 이를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연결짓는 것이 ‘상상’입니다. 이런 ‘상상’을 니체는, 자신을 포획한 사슬을 끊고 ‘동일한 자아로 (영원히) 회귀’하는 것, 즉 “내가 있었던 곳으로 내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무시무시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지양’은 이런 상상이 단지 앞으로만 향하고, 그 방식이 부정에만 의존하며, 따라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상상’의 우리식 표현이 바로 ‘원시반본(原始反本)’입니다. ‘원시반본’은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었던 본래의 뿌리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찾자는 것입니다.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 선생은 “원시반본하는 세상을 따르는 회상(상상)”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 첫 실천으로 ‘저축조합’(협동조합)과 ‘방언공사’(지역공동체운동)를 펼쳤습니다. 물질이 개벽했으니 이제는 정신을 개벽할 때가 왔다고,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인간이 본격 등장할 때라고 했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나 박중빈의 ‘개벽’을 비의(秘儀)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를 종교나 반이성으로 여기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마치 인간 해방인 양 이야기하지만, 이런 근대성이야말로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를 낳았고, 그 결과로 인간과 그 관계(=사회)는 오히려 더 큰 미신(=자본)과 반이성(=권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교해 그분들의 이야기는 ‘한 인간’이 비로소 인류 역사의 참 주인으로 등장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한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결사’가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가 통째로 바꿀 거라는 전망입니다.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의 첫 번째 모습은,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념과 이성의 포획된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상상하는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속에서, 사회 전체를 바꿔낼 해방적 비전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이제는 사회적 경제를 상상하고 이야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2) 사회적 경제의 지향과 전략 : 자기 위치에서 모두를 담아내고 연대하기 몇 해 전 유럽 사회적 경제의 대가인 쟈끄 드푸르니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럽의 사회적 경제에 대해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사회적 경제의 필요성을 “보다 근본적이고 다른 수준에서 경제적 다원주의를 보증하거나 강화할 수 있는 주요한 매개물”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옳은 말이지만, 반쪽짜리 옳은 말입니다. 그의 ‘경제적 다원주의’ 주장은 지금의 유럽, 특히 시민사회의 합리성이 확보된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경제가 ‘삼분정립(三分鼎立)’―사회적으로는 시민사회·민주제 정치·자본제 시장,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경제·국가경제·시장경제의 정립―의 한 주체이면서 매개라는 그의 주장은, 시민사회가 국가나 자본에 휘둘리고 따라서 국가-시장-가정을 합리적으로 매개(연계)하기 어려운 사회에서는 먼발치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경제적 다원주의’ 운운하는 것은, 사회적 경제를 자본이 동여매는 수천 가지 거미줄에 종속시키거나(레닌), 국가의 하부기관으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주장을 단지 경제적 다원주의로만 이해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를 “복수의 경제원리가 혼합된 경제적 다원주의의 하나”(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로만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사실 ‘경제적 다원주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고 다른 수준에서’입니다. ‘경제적 다원주의’는 ‘보다 근본적이고 다른 수준’을 향해가는 사회적 경제의 성과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그 자체가 지향이 아닙니다. 사회적 경제의 지향은 ‘국가와 시장의 경계에서’(일자리위원회) 국가경제와 시장경제를 매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는 데 있고, 그 성과의 하나로서 경제적 다원주의가 드러날 뿐입니다. 한 인간과 그들의 사회적 경제는 사회 전체로 보면 ‘부분’이지만, 동시에 개개로 보면 ‘전체’입니다. 따라서 (전체에 대해서는) ‘다원성(多元性)’을 담아내면서 동시에 (개체에 대해서는) ‘전일성(全一性)’을 담아내야 하고, 이를 통해 ‘매개’인 동시에 ‘주체’로서 자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다원주의의 하나’가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전일적 개체를 지향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이런 지향을 담은 개체들이 더 큰 차원―가령 지역사회 차원 같은―에서 다원적 개체로 연대해야 합니다. “재분배는 국가경제의 몫이고, 상품교환은 시장경제의 몫이며, 호혜야말로 사회적 경제의 몫”(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이라는 주장‘경제 행위의 다원성’―재분배·상품교환·호혜―을 ‘경제의 다원주의’―국가경제·시장경제·사회적경제―로 둔갑시킨 철 지난 체제론이고 기능주의일 뿐입니다. 사회적 경제의 지향은, (우리 안에서) 호혜를 기반으로 상품교환을 해왔던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는 (우리 밖을 향해) 재분배를 행하자는 것입니다. 사회적 경제의 전략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호혜·상품교환·재분배를 통일시켜가는 이런 사회적 경제조직들이 더 큰 (지역)사회를 향해 연대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을 살리고, 진정한 인간의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고려말 이암은 “하나를 잡지만 그 안에 셋을 담고(執一而含三), 이런 셋을 모아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會三而歸一)”고 했습니다.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의 두 번째 모습은, 한 인간과 그들의 사회적 경제조직이 철 지난 체제론과 기능주의를 넘어 하나의 완성된 개체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고, 이런 실천들이 지역 차원에서 모여 한 인간을 살려내고 사회 전체를 바꾸는 해방적 연대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열망을 가지고 이제는 사회적 경제를 실천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3) 사회적 경제의 역사와 목적 : 소외를 극복하면서 자연으로 회귀하기 뜻 있는 사회적 경제 활동가분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 경제는 국가나 자본의 시녀가 아니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경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함이다”는 말입니다. 전자가 사회적 경제의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라면, 후자는 사회적 경제의 목적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회적 경제가 국가나 자본의 시녀가 되지 않으려면, 사회적 경제의 역사와 목적을 국가나 자본이 정해준 것과는 다르게 봐야 합니다. 사회적 경제의 역사를 고작 19세기 이후, 즉 국가와 자본이 결탁해 인간과 사회를 소외시킨 데서만 찾아서는 태생적으로 그들의 시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경제의 목적을 고작 국가가 해야 하는 ‘공익(公益)’과 기업이 해야 하는 ‘사회적 가치’의 추구로만 보아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나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사회적 경제 고유의 역사를 찾아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들이 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고유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는 본래 사회의 대외적 표출이었고, 자본은 본래 사회의 내부적 동력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묻혀 있던(embedded)’(폴라니) 인간의 무리들 ‘사이’에서 사회를 태동시키면서 시작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자본의 도움이었으며, 국가는 이런 사회가 대외적으로 드러낼 때나 존재했습니다. 중국과의 대외적 관계에서나 신시(神市) 사회가 ‘(고)조선’으로 소도(蘇塗) 사회가 ‘마한’으로 드러났지, 신시와 소도의 사람들이 자신을 조선인·마한인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소외’란 바로 이런 사회·국가·자본의 관계가전도되면서 생긴 말입니다. 즉, 사회의 대외적 표출인 국가가 그 사회 내부를 지배하게 되고, 이를 다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온 자본이 생명집적’에서 ‘화폐집적’으로 변모해 지배하게 되면서 생긴 말입니다. 19세기 이후에 ‘소외’가 사회적 경제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전도된 사회·국가·자본의 관계가 지배-피지배 관계가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지배-피지배 관계를 ‘묻혀 있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즉 ‘원시공산제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일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온(disembedded)’ 덕에 시작되었고, 자연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인간의 노력―여기에 사회적 경제의 원류가 있습니다―이 인류의 가역적(可逆的) 삶, 즉 시쳇말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국가나 자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나 자본이 사회로부터 떨어져나왔지만, 이런 국가나 자본을 다시 사회로 회귀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이때부터 사회적 경제가 시작되었습니다―이 그들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이때의 ‘회귀’는 묻혀 있던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재정립하자는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왔으면서도 자연을 지배하는 사회, 사회의 대외적 표출이었으면서도 사회를 지배하게 된 국가, 사회 형성에 기여했으면서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공생의 관계’로 재정립하자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떨어져나온(disembedded)’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고착화 즉 ‘돌출(disembeddedness)’에 있고, ‘외화(外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외화’‘자립한 외화’를 뜻하는 ‘소외’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이런 ‘소외의 과정’을 걸어왔다면, 사회적 경제는 이를 ‘공생의 관계’로 재정립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적 경제의 원형은 19세기 유럽에서 태동한 것이 아니라 (이름이야 어 떻든)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한국사회에는 미처 ‘사회적 경제’라는 이름표는 달지 않았으되, 사회적 경제의 원리와 방식으로 추동되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었”(「2018 사회적경제 보고서」)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적 경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류가 사회를 형성하는 한 (이름이야 어떻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사회적 경제는 사회로부터 떨어져나온 국가나 자본을 다시 사회로 회귀시키는 데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인간과 사회가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인간과 사회가 자연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국가와 자본의 사회 회귀가 가능하다는 것이 사회적 경제가 재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소외’ 대신에 ‘배제’라는 말을 씁니다. 국가나 자본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는 데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배제해온 것들을 포섭하는 데, 사회 안에 자연을 담아내 사회를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데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경제가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포섭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은, 그들이야말로 자연의 표상이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포섭이 곧 자연으로의 회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천을 굳이 〈이익〉이나 〈가치〉라는 말로 설명하자면,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익(公益)’이 아니라 이방인을 환대하자는 ‘홍익(弘益)’이고,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동시적 추구를 넘어 ‘자연의 가치’를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의 세 번째 모습은, 《자연→사회→국가→자본》으로 향해온 소외의 역사를 《자연←사회←국가←자본》으로 회귀하려는 인류의 비원(悲願)을 담은 것이고, 이를 위해 ‘공익’과 ‘사회적 가치’의 추구를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생명의 본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서원(誓願)을 가지고 이제는 사회적 경제를 구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3. 맺음말 : 사회적 포섭운동으로서의 사회적 경제를 향해 내가 꿈꾸는 사회적 경제는 한마디로 사회 영역에서의 사회적 포섭운동입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을 소외시켜온(배제해온) 국가나 자본을 포섭하자는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이 소외시켜온(배제해온) 자연을 포섭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자연에 사회적 포섭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국가와 자본의 사회적 포섭이 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적 경제는, 협동조합·자활·사회적기업 등의 역사를 잇지만 동시에 크게 차원변화한 사회운동입니다. 아니, 이런 운동들을 일으켰던 분들의 숨은 취지를 처음으로 전면에 드러낸 것입니다. ‘사회’의 순우리말이 ‘나라(國)’입니다. 나라(國)는 결코 국가가 아닙니다. 동아시아에서 ‘국(國)’이 붙은 것은 모두 ‘(지역)사회(community)’를 가리켰고, 국가 이름에는 오히려 ‘국(國)’자가 붙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회(community)’가 무너져가자 다시 이를 세우려 생겨난 것이 ‘사회적(social)’ 실천이고, 그 주체가 바로 ‘사회적 인간(socialist)’입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실은 이런 사회적 실천을 ‘폭력적’이 아닌 ‘평화적’으로 행하자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전략은 ‘국가정책’이 아닌 ‘나라살림계획’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때 최치원 선생은 우리 나라(사회)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하고, 그 무리를 ‘나라의 선인(國仙)’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풍류’하면 보통은 놀이로 폄훼하지만, 실은 자연의 숨결(風)과 흐름(流)에 따르는 실천입니다. 요즘 말로 치면 ‘풍류’는 ‘사회적 경제’이고, ‘선인’은 그 주체인 ‘사회적 인간’이었던 셈입니다. 나아가 최치원은 ‘풍류’의 모든 가르침이 ‘선사(仙史)’에 있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포함삼교(包含三敎)’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선사’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사회를 형성한 신시(神市) 이래로 이어져 온, 요즘 말로 치면 일종의 사회운동 교본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내용이 ‘포함삼교’와 ‘접화군생’이라 함은, 서로 다른 입장과 방식을 내 안에 통일시키고, 이렇게 통일되어가는 전체적 개체들이 서로 융합해 뭇 생명과 그 관계를 살리자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나라(사회)에 이와 견줄만한 사회운동 철학과 사회적 경제 전략이 있었겠습니까? 내가 꿈꾸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경제는, 이런 유구한 사회운동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나에 대한 절대적 긍정과 동료와의 상호적 결사를 바탕으로 이방인을 환대하는, 즉 《자애(自愛)⊆우애(友愛)⊆형제애(兄弟愛)》를 통해 《사익(私益)⊆공익(共益)⊆홍익(弘益)》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를 통해 무너진 (지역)사회를 재창조하자는 것입니다. 미천한 내 꿈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김기섭 사진 원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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