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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운동의 확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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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운동의 확산

원주의 협동조합 태동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이 지난해 12월 31일 발행한 「협동조합도시원주 아카이브 ARCHIVE)」에서 옮겨온 것이다. 1960대 협동운동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총 4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호에서는 1970년대 협동운동의 확산과 1980년대 생활협동조합의 시작을 다룬다.

1970년대 협동운동의 확산

한국 최초의 학교신협, 진광신협

학교 협동조합 필요성 대두… ‘협동교육연구소’ 통한 교육 실시

경제적 자유경쟁으로 발생하는 ‘빈부격차’는 어려운 가정의 자녀에게 상대적 빈곤감을 가져다주고, 이는 학생문제로까지 연결되는 사례가 많았다. 진광중학교는 학교협동조합 운영으로 빈부격차를 줄임으로써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학교 분위기를 만들고자 신협이라는 인격단체를 도입하게 된다. 장화순 교장과 김용연 교감 책임아래 장상순 협동교육연구소 간사와 박재일 진광중학교 교사가 전담, 매주 1시간씩 ‘협동’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교육에 들어갔다. 농촌현실과 신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유토론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또 학생들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을 찾아가 학부모들을 설득해 조합결성을 독려했다.
1970년 1월 28일부터 4일간 교직원과 학생을 대상으로 신용협동조합 강습회를 실시하고, 2월 17일 진광신용협동조합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이후 두 차례 설립준비위원회를 열고 5월 15일 한국 최초 학교신협인 ‘원주진광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한다.
김용연 교감이 초대이사장직을 맡고, 학생 255명, 교직원 23명의 조합원을 구성한다. 1구좌 300원씩 3만8천590원의 출자금을 자본으로 학생들의 자율운영을 원칙으로 신협운영을 시작한다.

공동구매사업과 장학사업…정학위기 학생 구제
250만원의 자산이 확보된 후에는 수업료 미불로 정학위기에 놓인 학생을 구제하고, 교직원의 고이율 대출을 청산해 주었다. 또 교사가 교육에 전념하고, 지역사회개발문제연구에 열중할 수 있도록
간식거리를 시중보다 10~30% 저렴하게 판매하고 발생한 수익금은 전액 출자금으로 배당했다. 또 출자금에 대한 배당과 조합운영에서 나오는 이익배당을 동시에 실시했는데, 1972년 상반기 13%, 하반기 12%를 배당했다.
250만원의 자산이 확보된 후에는 수업료 미불로 정학위기에 놓인 학생을 구제하고, 교직원의 고이율 대출을 청산해 주었다. 또 교사가 교육에 전념하고, 지역사회개발문제연구에 열중할 수 있도록​ 신혼교사 생활터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창립 4년만인 1974년에는 학생과 교직원, 학부형, 교직원 자녀로 조합원이 확대되면서 791명의 조합원과 372만117원의 자산을 확보한다. 이것은 전국신협 강원지구평의회 산하 23개 단위조합 중 1위를 기록하는 성과였다. 1984년부터는 장학사업도 시작했다. ‘신협도우미’제도를 만들어 국가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학생이 매점에서 봉사 할 경우 급식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매년 중·고등학교에서 4명을 선정, 총 5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진광 졸업생 자립 돕는 신협 운영·진광신협 지점과 참빛신용협동조합 탄생
1993년 당시 원주관내 각 고등학교가 동문별로 특정 신협과 협력해 졸업생 자립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유일하게 진광학교만 졸업과 동시에 진광신협을 탈퇴해야하는 구조였으므로, 진광중·고등학교 동문과 교사를 위한 진광신협 지점을 만들게 된다. 진광신협 지점은 빠르게 성장해 3년간 30억원의 자산을 확보했고, 진광신협 본점에서는 신협지점을 독립시켜 졸업생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것을 발단으로 1996년 4월 ‘원주참빛신용협동조합’이라는 지역조합이 탄생한다. 원주참빛신협은 설립 3년만인 1999년 자산을 3배 성장시켜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할 수 있었다. 이후 2003년에는 육민관고등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남원주신협을 흡수 합병해 지점을 확대했다.




협동조합의 발판, 밝음신협

밝음신협 태동과 시작…밝은 사회 염원으로 결성

1971년 5월 부조리 없는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10여 명 원주시민이 ‘밝음회(가칭)’라는 모임을 만든다. 그 해 8월 25일 준비위원장인 김태환 씨 주도하에 발기인 15명을 구성하고 8월 31일 가톨릭센터 제2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연다. 입회비 200원, 1구좌 300원의 금액을 결정했고, 당일 가입금 6천200원, 출자금 9천300원, 지출 2천530원으로 티끌 같은 모임을 시작했다. 초대 이사장에는 박일송 씨가 추대됐으며,
‘밝음신용협동조합’ 이라는 정식 명칭을 만들고, 수차례 임원회를 거쳐 조합의 틀을 만들어 갔다. 이렇게 태동한 밝음신협의 첫 해 출자금은 1만5천807원이었다. 대성학교 교사 김태환 씨가 주로 사무를 맡다보니 조합원도 대성중고등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구성됐고 1972년 지학순 주교의 도움으로 가톨릭센터에 첫 사무실을 마련하게 됐다. 그 해 첫 정기총회를 통해 장상순 씨가 제 2대 이사장을 맡았고, 적극적인 조합원 가입을 위해 조합원 카드에 사진을 붙이는 등 조직적인 관리를 시작했다. 3월 5일 열린 임원회에서 대출과 여신 업무 취급에 대한 원칙을 정하기도 했다. 자기 출자금의 2배, 상환기간 5개월, 이자 월 2부, 대출액 5천원으로 범위를 결정했다. 1972년 6월 30일 333명의 조합원과 자산 44만7천471원으로 성장시키며, 8월 2일 신용협동조합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8월 17일 법률 제 2338호로 공포·시행 된다. 두 달 뒤인 10월 7일 발기인 대회를 새롭게 열고, 10월 14일 신협법에 의해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김인성 씨를 제 3대 이사장으로 선임하고 공동유대를 ‘밝음회 회원’으로 정하게 된다. 같은 해 10월 19일 재무부에 설립인가를 신청하고 12월 30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제 4-5호 설립인가를 취득한다. 이듬해인 1973년 2월 19일 등기를 필하고 신협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창립 2년 만에 조합원 444명, 출자금 1만1천436구좌 113만2천906
원의 결실을 거둔 것이다. 1973년 4월 17일 대성중고등학교 재직 교사와 학생 조합원을 중심으로 원주대성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면서 밝음신협 전체 조합원 자산의 70% 이상이 원주대성신용협동조합으로 이관된다. 이때부터 일반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출발의 전기를 마련한다.

조직 안정과 성장…총자산 300% 이상 증가, 16% 배당 성과 기록
1973년 8월 2일 최초의 유급 직원을 채용하고, 대부규정 심의와 본격적인 여신업무가 이뤄진다. 8월15일 제 8차 정기이사회에서 쌀, 마늘, 고추 등의 농산물 공동구매사업을 의결하고, 이사들의 협조로 직원을 위한 자전거 구매와 회보발행, 교육 등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펼친다. 1974년 2월 17일 법인설립 후 제 1차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김인성 씨를 이사장에 선임한다. 4월에는 당시 원주기독병원과 의료혜택 계약을 체결하고 조합원이 기독병원 이용 시 20%의 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신협운동에 열정을 쏟는다. 그 결과 전년도 말 총자산 300%이상 증가한 6천500만원으로 마감하며, 조합원에게 16%의 고배당을 하는 성과를 거둔다. 1975년 1월 31일 정기총회에서 제 4대 이사장으로 장상순 씨가 재 추대되고, 3월에는 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통해 ‘국제 큐나공제협동조합’에 가입한다. 7월에는 일일적금을 신설, 조합원이 푼돈으로 목돈을 만들 수 있는 신상품을 개발하고, 이듬해인 1976년 10월 밝음신협은 전국 신협 자산규모 24위에 등재된다.
1977년 10월 22일에는 신협중앙회 강원도지부 전신인 강원지구평의회에서 강원도 공동지역 창구로 밝음신협을 지정할 것을 결의하고, 연합회의 공제사업부에 300만원의 공제기금을 투자한다. 79년 9월 1일 평의회가 독립하면서 분리하게 된다.

IMF금융위기 극복…성장 거듭하며 지점 확대
1993년에는 밝음신협 건물 근처 교회땅 998.3㎡(302평)을 지역사회 개발 사업에 활용하기 위해 27억원에 매입한다. 그 땅에 3억원을 들여 1994년 12월 84대의 차를 세울 수 있는 유료 주차장을 준공한다. 이곳에서 첫 해 1억6천만원, 다음해 2억원 정도의 수입이 발생했지만 1998년 원주시의 주차사업이 시행되면 서 급격히 수입이 떨어졌다. 유료주차장 사업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조합 운영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한국이 IMF관리체제에 놓이게 되면서 조합에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이 때 건물 3층, 5층, 6층, 옥상을 임대하게 된다. 더불어 인사개편을 하는 등 위기극복에 만전을 기하는 가운데 2000년 3월 서원신협과의 합병으로 ‘밝음신협 단계지소’를 개소한다. 이후 밝음신협 출발 40년째인 2011년 5월 자산 1,000억원을 달성 했으며, 지난 2015년까지 단관점, 무실점, 혁신점을 개소하는 등 내외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1980년대 생활협동조합의 시작

생명사상

생명운동으로 발전

원주지역의 협동조합운동은 성장과 개발중심의 경제정책 아래 급속하게 붕괴된 농촌지역을 보면서 성찰과 함께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된다. 생산력 중심의 도시공업 산업화정책은 농촌인구를 급속히 격감시켰고, 그나마 있는 농업도 화학농약과 화학비료에 오염되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도시민들의 삶도 어렵게 하고, 도시 공업화의 그늘에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인간 삶의 조건이 어려워지는 점을 보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는 새로운 생각을 갖고 운동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이 ‘생명사상’이고 ‘생명운동’이다.
두 사람은 천주교 일본교구와 연계해 1981년 교구 내 지도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을 일본의 유기농업현장과 생협운동을 견학하도록 한다. 이를 토대로 사회개발위원회는 생명운동과 생활협동조합운동을 보급하기 위해 ‘일본의 유기농업’ 관련 자료를 발행한다. 이어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운동 실천을 위해 1984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일본유기농업과 생활협동조합운동연수’를 진행하고, 1985년 최초의 도시 생협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현 원주한살림)을 결성한다. 생협운동의 구성원 중에는 농업생산자가 함께하고 있으며 그들은 주로 유기농업을 비롯한 친환경농업에 의해 농산물을 생산하고 이를 직거래한다. 그렇게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모토와 결합했다. 특히 생협운동은 지역사회라는 공간에서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한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주민자치 활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상과 활동 내용은 생명운동의 영향을 받은 바 크며, 많은 생협운동 사상은 생명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1980년대 초 원주그룹은 내부적으로 1970년대 부락개발운동에 기반한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평가와 향후 대책을 모색하는 일련의 치열한 논의과정을 거쳐 1982년 초 ‘원주보고서-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을 내놓는다. 이 문건은 1970년대 후반 원주지역의 반독재투쟁과 부락개발운동에 기반한 협동조합운동을 거쳐 형성된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1980년 12월 출옥 직후 천주교 원주교구 기획위원 신분이었던 김지하 시인이 장일순 선생의 권유에 따라 대표 집필을 맡아 1981년 9월 경 초안이 작성, 검토·수정을 거쳐 1982년 초 완성됐다. 이 문건은 1960~70년대 장일순 선생을 중심으로 한 원주그룹이 정서적·문화적 수준에서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 운동론이 일정하게 체계화되고 정리되어 나타난 것으로써, 1970년대 초 태동한 민중의 생존권 실현에 한정되었던 ‘생명’의 문제의식이 1970년대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최시형의 동학사상 등에 대한 재해석과정을 거쳐 ‘사람’에서 ‘자연’과 ‘사물’의 영역으로 그 사상과 운동의 인식범위가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원주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

‘원주소비자협동조합’으로 창립
원주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한살림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1985년 6월 24일 ‘원주소비자협동조합’으로 창립해 1987년 참기름·들기름 가공과 공급을 시작했고, 1990년 ‘원주한살림소비자협동조합’으로 조합명을 변경했다.
1992년 중앙매장을 개장했으며, 1993년 ‘원주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다시 한 번 명칭을 변경했다. 이어 1993년 명륜매장(현 구곡매장), 1994년 단계매장, 1996년 본부매장(현 개운매장), 2004년 춘천매장을 차례로 개장한다. 춘천매장은 사업성 약화로 2006년 폐장 했다가 2011년 재개장했고 2016년 2월 1일 분리하며 자체 운영에 들어갔다.
조합원 활동과 직거래사업에 충실하기 위해 2008년 기름가공사업을 분리·법인화 했다. 2017년 10월 31일 기준 출자조합원은 8천608명, 출자금은 약 9억7천5백여만원이다.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

‘생명운동’ 시작…원주생협 전신 호저생협 탄생
1960-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며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으로 생명과 생태계 파괴가 심각해졌다. 이런 모순에 대응하여 환경오염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운동조직인 공해문제추방운동연합이 결성됐고, 농업을 토대로 하는 생명운동조직인 한살림운동이 시작됐다. 1980년대는 민중운동의 강화와 함께 생명운동이 시작된 시기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생명운동은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1993년도부터 시민운동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이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동시에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조직이 생겨났다. 원주생협 전신인 호저생협은 이런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사회적기업 원주생명농업(주)




친환경농산물 공급…농촌형사회적기업으로 발전

원주생명농업은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 벼농사와 함께 소규모 다작물 생산체계를 지향하며, 한우사육을 연계한 원주지역순환농업을 실현하고 있는 단체다. 1989년 호저교회 한경호 목사 주도 하에 호저소비자협동조합(호저소협)이 창립됐다. 한 목사는 호저지역 농민의 경제적 권익을 위해 생명농업을 기치로 호저생협을 만들게 된 것이다. 창립 이후 10여년간 마을구판장, 미장원, 참기름 공장 등의 마을사업과 수도권 아파트·교회간 도·농 농산물 직거래사업을 통해 판로를 개척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호저생협은 농민이 생산한 친환경농산물을 지역 내에서 소비하기 위해 원주시민단체와 공동으로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재창립 한다. 이때부터 지역 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생활협동조합운동을 펼치게 된다.
2016년 12월 기준, 회원 농업인의 누적출자액은 5억4천만원이며, 연간 친환경농산물 매출액은 3억6천300만원에 달한다.




출처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