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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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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진광협동교육연구소의 활동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에 신용협동조합이 처음으로 보급된 것은 캐나다에서 신용협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안티고니쉬 운동)을 공부하고 온 메리 가별 수녀가 1960년 5월 1일, 부산 대청동에서 한국 최초로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고, 이어 같은 시기에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온 장대익 신부가 서울에서 가톨릭중앙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함으로써 비롯되었다. 특히 이미 부산에서는 ‘협동조합 교도봉사회’가 설립되어 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고, 서울에는 장대익 신부가 보내오는 자료들로 1957년부터 서울교구 내에 ‘협동경제연구회’(신용협동조합 준비모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조직은 부산의 교도봉사회가 1963년 7월 7일, 서울로 이전하여 협동교육연구원으로발전함으로써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여 이 땅에 신용협동조합이 전파되었다.

이 신협 운동은 당시 춘천교구의 소속이었던 강원도 장성성당 이영섭 신부에 의해 산간 오지인 강원도 탄광촌 장성에도 보급된 바 있다. 이영섭 신부는 부산에 있는 협동조합 교도봉사회의 이상호, 박희섭 교도원을 초청하여 본당 교우들이 5일간 강습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1962년 8월 18일 같은 날에 장성성당에 태백신용협동조합 그리고 관할 공소인 철암공소에 요셉신용협동조합과 황지공소에 황지신용협동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지역 여건상 운영이 잘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은 그 성과를 크게 보지 못했지만 원주교구장으로 부임한 지학순 주교에 의해서 강원도에 신협 운동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원주교구는 1965년 3월 22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춘천교구를 분리하여 창설되었고, 초
대 교구장으로 부산 초장동성당 주임 지학순 신부가 임명되었다. 지학순 신부는 그해 6월 29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함으로써 이후 평생을 원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가 초대 원주교구장에 부임하여 자신의 사목지를 방문한 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농촌과 광산촌, 어촌으로 이뤄진 교통이 매우 불편하고, 문화적으로 낙후한 지역이대부분이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농민, 광부, 어민들이었는데 대부분이 고리채에 시달리고, 비싼 물가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우선적으로 각 성당을 중심으로 문맹 퇴치 운동과 교회의 자립화를 전개하는 한편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도움으로써 가난을 몰아내고 믿음과 사랑의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협동운동을 보급하게 된다. 이미 지학순 주교는 자신이 사목하던 부산 초장동 성당에서도 신협을 조직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 교구 내 각 성당에 신협을 설립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오늘의 강원도 신용협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의 초석이 되었다.​

 

원주신협 창립

지학순 주교의 사목 방침에 따라 1966년 11월 12일, 주교좌 원동성당에서 신자 35명이 모여 출자금 64,190원으로 원주신협(이사장 장일순)을 조직하였고, 이어 문막(66. 12. 19), 단구동(68. 2. 25), 주문진(68. 4. 30), 삼척(69. 10. 25)에서 천주교회를 공동유대로 조직되었으며, 서강대 농촌봉사단에 의해 영월 삼옥2리 먹골부락에도 신협(68. 7. 20)이 조직되었다. 이같이 여러 성당에서 신협이 조직되어 가난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펴나갔으나 경영 미숙 등으로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발전적 전기를 마련하고자 원주신협 주최, 한국 신협연합회 지원으로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조합원 및 임원 강습회(1969. 1. 15〜18)를 열고 모범 조합원 장려, 조합원 및 임원 보수교육을 가졌다. 그러나 이 강습회를 통해 신협이 활성화되지 못한 원인이 계통 조직에 따른 지구평의회와 주재 지도역이 없다는 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원주신협은 경영의 미숙으로 곧 폐쇄되었다가 다시 지학순 주교의 물질적 도움과 장일순 선생의 지도로 지역 신협인 현재의 밝음신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진광협동교육연구소 설립과 강원지구평의회 창립
협동교육연구소 설립 
지학순 주교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협동운동의 지도자로 키울 사람을 물색하여 서울 협동교육연구원에 파견하게 된다. 이에 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를 수료하고 돌아온 장상순(1969. 9 서울 협동교육연구원과 연합회 공동주최로 열린 신협 지도자 강습회와 한국, 이스라엘 합동 주최로 협동조합 및 노동조합 지도자 강습회 수료)으로 하여금 어려운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1969년 10월 13일, 교구의 진광학원 부설 협동교육연구소(설립자 지학순 주교, 소장 장화순 교장, 부소장 김용연 교감, 간사 장상순)를 설립하여 원주교구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협동 세미나(전담 강사 : 장일순)를 3회(1차 70. 2. 23∼28, 12명, 2차 70. 3. 18∼21, 17명, 3차 70. 4. 2∼4, 13명)에 걸쳐 갖게 된다. 그리고 1970년 5월 15일부로 장상순이 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1964. 4. 24. 조직)로부터 자원지도역으로 정식 임명을 받게 되고, 이 해 협동교육연구원을 수료한 박재일이 합류하게 된다. 한편 춘천교구에도 자원지도역이 배치되었으나 곧 그만두게 되어 1973년도 중순부터는 이 협동교육연구소가 강원도와 충북 동북부지방, 경기도 동부 일부의 신협 창립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는데 신협 소개 강습회 및 재 강습회와 경영업무지도(1970. 1〜1976. 12)를 96개 단체와 연인원 10,949명에게 실시하였고, 이 기간에 농촌과 광산촌, 어촌 등 42개의 조합을 창립하였다.​

 

진광학교 신협 창립

이같이 연구소가 설립된 후 장상순 간사와 박재일 교사(전 한살림 회장, 당시 진광학교 교사였음. 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 수료) 등은 매주 1시간씩 「협동」이라는 과목을 두어 학생들에게 농촌 현실과 신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유토론을 하게 하는 한편 학부모들이 사는 교외의 자연부락을 찾아 조합결성을 권장하였다. 「푼돈 모아 목돈 만들어 서로 돕자」는 설득은 많은 학생의 호응을 얻었다.

마침내 1970년 5월 15일, 진광학교의 학생 255명, 교직원 23명의 조합원이 1구좌 300원인 출자금 38,590원으로 학교 신협으로는 우리나라 처음인 진광신협(이사장 김용연)을 조직하여, 학생들의 자율운영을 원칙으로 월 2부의 이자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교공납금 또는 집안살림에 급히 쓸데에 돌려졌다. 그동안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과 농촌의 청년들이 자주 학교조합의 운영 실태를 보러 왔고, 그 영향으로 원주 주변의 농촌 마을에도 신협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다 밟고 명랑한 학원 및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근검절약하는 정신으로 저축의 생활화를 도모하고 상부상조하는 협동 정신을 고취시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참되게 사는 민주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목적을 갖고 창립한 이 진광신협은 여·수신 업무 외에 학생들을 위해 공동구매사업을 실시하여 학용품, 책 등과 간식을 취급하는 매점과 공동이용시설사업으로 교직원과 학생을 위한 식당을 직영으로 운영하는 한편 장학사업도 실시하였다. 현재 교육제도와 환경의 변화로 공동 구매사업의 운영이 많이 위축되었고, 식당 운영은 무료급식사업으로 학교가 직영을 하게 되어 현​재 소규모 매점운영과 여·수신업무만을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재학 중 교육받은 협동 정신과 직접적 조합운영의 참여 경험은 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지역의 저소득층과 영세소상인들을 위한「참빛 신협」을 설립하여 지역사회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강원지구평의회 창립
이 같은 협동교육연구소의 활동이 주요 일간지(동아, 강원, 서울) 사회면에 소개되어 이 연구소의 활동을 통한 강원지구 신협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1972년 4월 26일 원주·원성지구 신협 임원강습회가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되었고, 이어 1972년 6월 17일에는 강원도 내 12개 단위조합이 참가하여 한국 신협 강원지구평의회(간사 : 김용연)를 창립하였고, 사무실을 진광학교 내에 있는 진광협동교육연구소에 두고, 자원지도역인 장상순으로 하여금 업무를 집행하게 하였다. 특히 1972년 8월 17일, 신용협동조합법이 공포됨으로써 단위조합들은 신협법에 의거 개편하고 재무부인가와 법원등기를 해야하는 시한부 업무가 주어졌다. 1972년 10월 8∼9일까지 12개 조합이 모여 법인 설립지도 강습회를 마치고 72년 12월 30일부로 9개 조합(원주 진광, 원주 세교, 주문진, 풍정, 원주밝음, 청파, 문막, 정선, 장성)이 재무부 인가를 받고 3월 내에 관할 법원에 등기를 마쳤으며, 2차로 73년 3월 9일부로 8개 조합(운교, 삼척, 고성, 속초, 신림, 인제, 강릉, 태백)이 인가를 받고 등기를 마쳤고, 3차로 4월 2일 평창이 인가를 받았다. 이때 원주 시내에 있던 원주, 단구동, 영랑조합은 법인 인가 과정에서 공동유대의 일체성을 갖고 원주밝음 조합에 합병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강원도 내 신협 조직 육성

이같이 1972년 8월 17일, 신용협동조합법이 공포됨으로써 단위조합들은 신협법에 의거 개편하고 18개 조합이 재무부인가와 법원등기를 해야 했다.

또한 재무부 인가에 따른 전국의 연합회도 법인연합회로 재창립을 해야 하므로 설립발기인으로 1973년 1월 20일 강원지구평의회 김용연 간사장이 선정되고, 3월 23일∼24일 연합회 총회에서 자원지도역 장상순 씨가 감사로 선출되었다. 한편 1973년 10월 27일∼28일 강원도 법인인가 조합들이 모여 임원강습회 및 강원지구평의회 개편 총회를 갖고 김인성 밝음신협 이사장을 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장상순 연합회 감사를 간사(幹事)로 위촉하였다. 1975년 1월 7일 연합회에서는 강원지구 지도역으로 협동교육연구원을 수료한 이병욱(당시 밝음신협 전무)을 임명하고, 사무실을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 교육원(원주시 개운동 258-4)으로 이전하여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진광협동교육연구소는 초기 신협 조직 운영을 지도하면서 강원지구평의회의 업무까지 대행하였고, 특히 신협법이 공포되면서 18개 조합의 재무부인가와 법원등기를 필할 수 있도록 지도함으로써 강원도 지역민들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며 발전해 오늘의 강원도 내 단위 신협들의 연합체인 한국 신협중앙회 강원연합회의 초석을 놓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와의 협력활동(신협과 소비조합 육성)

1972년 8월 19일, 남한강 유역에 내린 대홍수로 원주교구 관내의 원주를 비롯한 정선, 태백, 영월, 단양, 제천 그리고 그 외 충주, 여주, 양평 등이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되자, 서독 까리따스와 미제레올의 도움을 받아 재해민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한 지원금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이 지원금의 도착이 지연되어 효과적으로 재해민을 도울 수 없게 되자 무상지원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하고, 농부와 광부들의 자립기반조성을 위한 장기 지원 사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원주교구는 1973년 1월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재해대책사업을 착수함에 있어 하나의 기본원칙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이들 사업 중 긴급 식량 구호사업은 무조건 배급을 주던 방식을 지양(止揚)하여, 1인 1일 노동에 대한 보수로서 쌀 10㎏짜리 1포대를 지급받게 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전답 복구사업, 부락개발사업, 지역개발사업에 지원된 모든 사업비도 반드시 상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착수된 재해대책사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재해대책사업은 4단계로 나뉘어 있어 1단계는 긴급 식량 구호사업, 2단계는 전답 복구사업, 3단계는 부락개발사업, 4단계는 지역개발사업이었는데, 이들 4단계 사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추진해​온 사업이 3단계 사업인 부락개발 사업이었고, 이는 재해대책사업의 중심이었다.

우선 부락개발 사업을 전개하는 데는몇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주요한 것이 사업의 선정은 가능한 한 생산적 사업이며, 지속적인 소득을 올릴수 있는 사업이면서 개인적인 사업이 아닌 공동사업으로 선정하였고, 협동적 개발원칙에 의하여 모든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원칙에 의거하여 진행된 부락개발사업의 구체적 성과는 한우작목반의 조직과 운영, 그리고 당시 농촌과 광산촌의 심각한 문제였던 고리채 해결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의 조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진광협동교육연구소와 협력하여 농촌 지역에 53개의 조합과 광산지역에 15개의 신협(1987년 현재)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의 상담원과 함께 현장 교육뿐만 아니라 부락의 지도자들의 초청 교육, 실무자 교육을 통해 회의 진행법, 이사회운영, 회계(복식부기)교육 등을 필수적으로 진행하였는데 이런 교육은 후에 전개될 소비자협동조합(현 생활협동조합)의 교육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신용협동조합의 운영 경험은 농민과 광산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켰고, 다음 단계로 구판장사업 즉, 소비자협동조합(현 생활협동조합)의 확장과 지역 차원의 자립, 통합 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특히 농촌소비자협동조합 협의회와 광산소비자협동조합 협의회의 조직과 연대 활동은 후일 생산자와 소비자의 만남을 통한 도농 직거래 운동으로 발전하여 오늘의 한살림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 소비자협동조합은 중간상인의 횡포를 방지하고 유통구조를 개선함으로써 농민과 광부조합원의직·간접적인 경제이익을 도모하고, 협동조합의 운영과 교육 사업을 통해 민주 의식의 고양 및 협동적 삶의 실현을 추구해 나가는데 그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이 소비자협동조합은 초기에 부락과 광산촌 내의 기존 가게나 부인회 가게 등과의 마찰이 있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농민과 노동자들 스스로 요구가 결집되면서 원주교구 지역 내에 50여 개 이상의 단위조합이 결성되는 성과에 힘입어 마침내 전국으로까지 확대되었고, 1989년 3월에는 소비자협동조합 중앙회가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정식으로 사단법인 인가를 받기에 이른다.​

 

맺는 말


진광협동교육연구소는 오늘의 강원도 신용협동조합의 산실 역할을 하였으며 그리고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사업위원회와 함께 농촌 지역에 신용협동조합 54개 부락, 소비자협동조합 38개 부락과 광산지역에 신용협동조합 15개 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 15개 조합을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비록 80년대 들어 급격한 이농 현상으로 농촌 신협과 소비조합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또 석탄합리화사업으로 인하여 탄광이 폐쇄됨에 따라 고한, 태백, 장성 등 몇몇 지역 신협을 제외한 협동 조직이 와해되었지만 농민과 광부들의 의식계발과 협동체 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특히 원주의 밝음신협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직 간의 협동으로 탄생한 1985년 원주한살림 생협(최초명칭 ‘무점포소비자협동조합’)은 오늘 전국의 한살림 운동의 모태가 되었으며, 2002년 의료생협을 탄생시켰고 2003년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가 출발하여 오늘의 협동네트워크 기반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2012년 이후 협동조합 기본법에 의한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활동, 사회적협동조합의 조직 운영의 중심이 된 원주 협동광장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원주가 협동조합의 도시가 된 그 뿌리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물심양면의 도움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정신적 지도에 있으며, 이를 실천에 옮긴 협동교육연구소와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조합은 조합원이 주인이라는 것.

관리하는 직원이 아니라는 것.

조합원을 살려야 조합과 내가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스스로를 낮추고 조합원을 높이는데 길이 있을 거야.
직원의 할 일은 조합원이 잘살게끔 일하는 것이다.

이 관계를 잊는 데서 모든 문제가 일어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말씀 중에서


정리 무위당사람들 편집위원회
<이 글은 무위당사람들 66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