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풍경


협동조합 공부노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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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파고든 협동조합

원주의 협동조합 태동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이 지난해 12월 31일 발행한 「협동조합도시원주 아카이브 ARCHIVE)」에서 옮겨온 것이다. 1960대 협동운동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총 4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1990년대 삶으로 파고든 협동조합과 2000년대 협동조합의 네트워크에 대해 싣는다.

1990년대 삶으로 파고든 협동조합

원주공동육아협동어린이집 소꿉마당


‘어린이 걱정 모임’에서 출발한 공동육아협동조합

사단법인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의 역사는 1970년대 말 도시 빈민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탁아 운동을 전개한 ‘어린이 걱정 모임’에서 출발했다. 당시 군부 독재에 저항해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대학생들은 노동현장,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변두리로 형성된 빈민 지역에 관심을 가졌다. 서울 구로구 난곡동 천막촌에는 기존의 농촌 공동체를 잃고 쫓기듯 모여들어 밤낮없이 일하기 시작한 어른들로부터 방치된 아이들이 있었다.정병호(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공동대표), 이기범(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상임이사)을 비롯한 대학생들은 1978년 방정환 정신이 뿌리가 되는 ‘어린이 걱정 모임’을 결성했고, 같은 해 1920년대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했던 마해송을 기억하며 ‘해송보육학교’를 만들었다. 야학을 졸업한 노동자들 가운데 선발을 통해 빈민가에 방치된 미취학 어린이들과 함께할 활동가(교사)를 양성했다. 정부의 탄압이 있기까지 4년간 40여명의 대학생이 가르쳤고 2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200명이 후원했다. 이후 해송유아원이 새마을유아원으로 편입된 후 어린이걱정모임 활동을 재개해 무허가 주택밀집지역인 서울 창신동에 ‘해송아기둥지’를 만들게 된다. 교사들은 척박하기만 한 주변 환경이 아이들에게 ‘자연’이 될 수 있도록 흙과 물에서 놀고, 놀이재료를 만들고 낮잠을 잤다. 권위주의를 내세우지 않고 ‘이모’나 ‘삼촌’으로 불리며 아이들에게 친근한 ‘어른’이 돼 주었다. 이후 ‘영유아보육법’ 재정에 대한 논의가 있을 무렵인 1990년 ‘또하나의문화’ 모임과 만나 ‘탁아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모임’이라는 단체를 결성, 2년 뒤 ‘공동육아 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공동육아 형태의 새로운 보육방식을 연구한 끝에 공동육아 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한다. 1994년 그렇게 모인 첫 번째 공동육아 협동조합은 신촌 연남동에 최초의 협동조합 어린이집 ‘우리어린이집’을 탄생시켰다. 2005년에는 영유아보육법상 보육시설 분류에 ‘부모협동보육시설’을 추가시키는데 공헌했으며, 공동육아협동조합 설립에 관련한 지원사업을 비롯해 교육사업, 저소득사업, 모델개발사업, 대외연대 협력사업 및 연구출판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에서 공동육아 시작…흥업에서 판부면까지
1998년 봄, 원주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독일 유학을 다녀온 박영옥 선생은 독일에서 느끼고 배운 교육의 다양한 방식에 대해 지역신문에 기고했다. 이 기고문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공동육아의 필요성과 관심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되었고, 급기야 한자리에 모여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박영옥 선생을 주축으로 교사를 모집하고, 원주시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1999년 5월 부모, 교사 등 9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원주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 ‘소꿉마당’이 흥업면에 자리를 잡았다. 2001년 단계동 정부종합청사 앞 쪽에 제법 널찍한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고 17명의 아이들과 5명의 교사가 함께 지냈다. 도심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아 편리한 점이 있었지만 바깥 나들이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문제로 몇 차례 어린이집 자리를 옮기다가 지난 2006년 일곱 가정이 지금 소꿉마당이 위치한 판부면 서곡리 땅을 공동으로 구입해 이사를 했고, 주변에는 조합원들이 집을 지어 '소꿉마을'을 만들었다. 조합원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여러 분과를 나누고 논의구조를 다양하게 만들기도 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매월 소식지를 발행하고 아이들 활동내용은 교사가 일일이 개별 수첩에 기재했다.
서곡리에 영구터전을 마련한 소꿉마당과 소꿉마을을 중심으로 교육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방과후학교인 참꽃어린이학교 협동조합이 서곡리로 이주 하면서 교육공동체 가구 수가 15가구를 넘어 섰다. 2009년 반곡동 치악전술훈련장 서곡마을 이전계획이 발표됐고, 교육공동체와 마을주민이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 했다. 6개월만에 이전 백지화 선언을 받아내면서 치악훈련장 이전을 막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꿉마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공동체는 마을과 함께하는 생활공동체로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반성에서 시작된 것이 ‘제1회 용수골 작은 음악회’ 이다. 음악회는 해를 거듭하며 점차 마을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서곡리에 길터여행협동조합, 자연누리숲학교협동조합, (사)서곡생태마을 등 교육사업과 마을공동체 활동을 전개하는 곳들이 생겨났다. 거기에 서곡초등학교 등 마을 기관까지 참여해 7개 기관·단체가 모여 교육공동체인 서곡교육네트워크(2013년 구성)를 조직, 다양한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나들이와 신체활동 중심 교육
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은 부모와 교사, 아이들이 함께 교육환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아이들이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고 부모와 교사간 충분히 의견을 나눠 운영을 조율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간다. 교사 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는 아동수는 정부 기준 보다 40~50%가량 낮아,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원장직은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어 동등한 교사의 입장에서 역할이 주어질 뿐 권한을 갖거나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집 주변은 옹기종기 모인 집 몇 채를 제외하고 온통 산과 밭이다. 차량운행 대신 아침저녁으로 부모들이 아이들의 등·하원에 동행한다. 그 시간이 부모와 자녀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라고 여기는 교육철학 때문이다.
소꿉마당의 일과는 오전 나들이로 시작된다.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무와 풀, 꽃과 함께 어울려 놀고, 여름에는 오디나 산딸기를 따먹기도 한다. 비나 눈이 와도 날씨가 아주 험하지 않는 이상 나들이는 꼭 나간다. 그래서인지 현관에는 장화가 줄을 서있고 우비도 걸려있다. 오전 나들이 후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나면 오후에는 전래놀이, 노래배우기, 풍물놀이 등 반별로 놀이활동을 진행한다. 나들이와 신체활동이 주를 이루고, 교사와 아이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글이나 숫자를 가르치는 등의 학습은 하지않는다. 또한 식재료는 두레생협과 원주한살림생협 물품을 공급받아 사용해 건강한 식탁을 차리고 있다.


성공회 원주 나눔의집


원주에 좋은 복지모델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사랑 실천

1999년 6월 원주 YMCA 2층 강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공회 원주 나눔의집(이하 나눔의집)이 시작된다. ‘그리스도 예수 사랑의 정신에 따라, 생명 존중,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지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지역의 복지 사업을 통해 함께 사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한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위해 참여와 봉사를 통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가고자 할 것이다. 1999년은 IMF를 가까스로 극복한 시기다. 당시 원주의 복지사업과 정책은 질적·양적수준이 전국 중소도시들과 비교해 조금도 나을 바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원주에서는 협동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그 연대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과 궤를 함께하며 탄생한 것이 나눔의집이었다. 내부적으로, 활동가들은 운동성을 갖고 일하면서 원주에 좋은 복지모델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했다.
초기 사업으로 무의탁 노인돕기, 불우청소년 가장 돕기, 청소년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기독인의 바른가정 가꾸기운동 등을 전개했다. 성공회 교인들이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들 목욕과 학습지도를 맡았고, 무의탁 노인에게 반찬을 만들어 배달했다. 1999년 원주에서 첫 번째 가정결연사업으로 반찬 배달을 시작하고 ‘햇살공부방’을 열었다. 2002년 실업자 종합지원센터 ‘희망나눔터’와 원주생협 조합원 공동일터 ‘생명나눔터’를 위탁 운영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다양한 복지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다.
나눔의집은 협동운동과 연대에 동의해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창립멤버가 된다. 학성동에서 활동하고 있던 나눔의집은 2007년 지금의 장소인 호저면 주산리로 이전하고 농촌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늘봄학교, 반찬배달, 지역중장년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 호저 인문학교실 ‘담쟁이 학교’ 등을 운영해 오고 있다. ‘호맷골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바느질 경제활동, 마을카페, 작은 도서관, 문화동아리, 여성일자리 창출사업의 일환으로 가사 관리사인 ‘우렁각시’ 파견 등의 생활문화 공동체 복원과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00년대 협동조합의 네트워크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협동조합의 새로운 모델 구축…취약계층 사회서비스 실현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대한민국은 실업 및 일자리 문제, 복지인프라 부족, 빈곤 문제 등에 직면한다. 이때 원주에서는 국가적인 해결방안만 기다리고 있기보다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자립·자활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보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한다. 2000년부터 원주지역 협동조합 활동가 및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를 중심으로 본격적 논의가 진행되고, 지역사회에 새로운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협동조합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밝음신협, 원주한살림생협, 원주생협이 중심이 되고 지역 생명운동 선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 조합원 400여 명이 뜻을 모아 조합원을 구성한다. 일본생협에서 제공하는 노인·장애인 관련 돌봄 서비스 모델을 원주 지역사회에 맞게 실현할 새로운 협동조합 유형을 준비하게 된다.
2001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가 2002년 5월 ‘원주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 법인이 창립된다. 그 후 2002년 11월, 원주시 중앙동 밝음신협 건물 3층에 밝음의원과 밝음한의원을 개원하고 원주의료협동조합을 협동조합 간 협동의 모델로 소개하게 된다.
조합창립과 의료기관 개원으로 조합의 안정화를 위한 노력과 지역 주민 및 조합원 건강증진 사업을 병행한다. 2004년에는 사회적일자리사업을 통해 농촌지역 재가케어사업단을 만들어 지금의 노인요양돌봄사업을
개척하는 역할을 하게된다. 이후 2007년 사회적기업 인증 및 아동복지사업을 전개하며 사회적협동조합의 모델을 개척하고 2014년 협동조합기본법에 의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조직을 전환하여 조합의 내용과 형식을 통일시킨다. 10여 년 동안 의료·요양 기관 운영과 함께 아동복지사업, 주거복지사업, 사회적일자리창출사업, 농촌건강증진사업, 빈곤층의료지원사업 등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일궈낸다.
2017년 6월 사회적기업 제도화 10년을 맞아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 및 사회서비스 제공 등 사회적 가치 실현의 공로를 인정받아 고용노동부장관상을 받았다.


더불어살림협동조합호저소비자생활협동조합 창립을 주도했던 한경호 목사가 호저교회를 떠나 귀래면에 정착하면서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접경지역에 있는 부론면을 기점으로 3도의 농민들과 생협을 만든다. 남한강삼도생활협동조합은 2003년 3월 6일 부론면 복지회관에서 70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면서 탄생한다. 한경호 목사가 초대 이사장으로 조합을 이끌었다. 남한강 유역의 충청북도 충주시, 강원도 원주시, 경기도 여주군 등 3도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여 주민자치생활협동체를 이룬다. 토박이 농민, 귀농인, 일반주민들로 조합원이 구성됐고, 생명살림의 가치관을 중심에 놓고 새로운 농촌문화 건설과 복지사회 구현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1월 25일 귀래에서 부론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게 된다. 당시 선교를 위해 필리핀으로 나가기 전 임시로 실무를 맡은 김광욱 이사와 25년의 직장생활을 접고 자연을 찾아온 이광영 실무자가 일을 맡아했다.
이후 남한강영농조합법인으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해오다, 2016년 3월 3일 협동조합기본법에 의거해 ‘더불어살림협동조합’으로 옷을 갈아입고 재출범 한다. 더불어살림협동조합은 삼도생협과 남한강영농조합법인의 활동과 자산을 그대로 승계했다.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협동조합 네트워크 통해 ‘대안사회’ 기반 마련
2003년 6월 밝음신협, 원주한살림, 원주생협, 원주의료생협, 원주자활후견기관, 남한강삼도생협, 성공회원주나눔의집, 소꿉마당 등 8개 지역 협동단체가 모여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를 창립한다. 1997년 IMF를 겪으며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그동안 일궈놓은 조합들이 힘을 잃고, 축소되거나  해체되며 위기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이때 협동조합 단체 간 보다 밀접한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 자본에 대항하는 ‘대안사회 실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생명 도시에 걸맞은 시스템을 갖춰야 했다. 또 협동경제 이윤을 지역사회복지 개선을 위해 환원시켜 진정한 지역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모아 창립 의지를 굳히게 된다.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조합원 확대계획과 10대 사업과제를 설정했다. 소식지 ‘원주에 사는 즐거움’ 발행과 가을걷이, 송년의 밤 행사를 주도하고, 일본 생협과의 국제교류를 성사시켰다. 2005년 학교급식, 친환경농업육성, 보육 등 3대 조례제정 운동에 앞장서고, 2008년 3월 친환경급식지원센터를 개소하며 원주푸드 운동을 전개했다.


협동조합기본법 시행과 사회적 경제 영역 확대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제정되고 사회적 경제 영역이 확대되면서 2009년 7월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를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로 명칭을 변경한다. 이후 2009년 65차 UN총회에서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지정하는 결의문이 채택된다. 국내에서도 정부정책으로 2011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을 마련하고, 2012년 12월 1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2013년 3월 협동조합 기본법을 근거로 사회적협동조합 원주협동사회경제트워크로 재 창립하게 된다. 창립취지문에 의하면 ‘주민 삶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의 협동조합을 만들고, 협동조합 간 네트워크를 통해 자립과 자치, 돌봄과 나눔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한다. 또 함께 살아가는 방법, 함께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라는 미래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만들어 내자’는 철학을 담았다.
2017년 10월 말 현재 밝음신협을 비롯한 37개(단체 34개, 개인 3명) 사회적 경제조직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상지대 협동사회경제연구원 등 30여 개 협력단체와 함께하고 있다. 규모는 조합원 3만5천여 명, 고용인원 450여명, 자산 1천500억여원, 매출 400억여원이다. 사무국에는 실무자 6명이 근무하며, 조합원단체 회비와 교육, 대관수입, 후원금, 지자체 위탁 비용,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설립지원 위탁 비용으로 사무국을 운영한다.


글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