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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공동체를 향한 협동운동 리더교육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2-12
첨부파일 19.10_이슈.jpg 조회수 3,735

리더십의 본질을 묻다

-숙고하는 리더를 넘어 숙의 리더십으로

글 양세진(소셜이노베이션그룹 대표)


 

1. 들어가는 말: 지위(position)에 의한 리더십의 종언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로 이어지는 긴 겨울의 시간을 통해 ‘이게 나라냐!’며 광장에서 울분을 토했던 수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는 광장의 메아리로 머무르지 않고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2016년 가을이후 한국사회는 그 어느때 보다 시민들 각자가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에 대한 자기인식과 자기확신의 힘이 견고해지고 있다. 이러한 국민주권, 시민주권의 시대에 우리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리더십을 이야기했던 많은 이론가와 실천가들은 민주적 리더십을 이야기해왔다. 리더가 점유한 지위를 통해 함께하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강제하는 권위적이고 성과 지향적 리더십이 아니라, 실천적 소통을 통해 비전을 공유하고, 목적 지향적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비전지향에 따라 모든 실행을 정렬되어 수행하되 자기성장에 대한 동기를 갖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도록 이끄는 리더십을 강조해왔다. 한편으로는 리더십은 단지 탁월한 한 사람의 역량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협동과 협력을 통해 작동하는것이며, 그래서 리더 개인은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보적인 협력을 통해 비전과 목표를 탁월하게 성취해가는 팀 리더십, 클라우드 리더십, 어셈블리 리더십 등의 개념들을 주조하며 협동 리더십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민주적 리더십과 협동 리더십은 개념적으로는 탄탄하고 의미가 있으며, 그러한 리더십이 현실화될 경우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삶의 의미와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매일 매일 직면하는 일상의 분주함과 기능적이고 형식적인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서로가 서로를 도구화하는 관계 속에 갇히게 되면서, 마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그림으로 외면되고 있는 상황이다. 성과에 대한 압박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면, 우리사회 리더십의 현 주소가 어떠한지를 알 수 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 시대가 달라졌다. 한 낮의 향기로움으로 사라지는 꽃향기나, 한 때의 유행으로 흘러가는 대중문화와는 달리, 지금의 사회분위기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도 많은 여성들은 조직 내 불합리합 권력관계에서 오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 조직 내 성폭력의 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나 최고 권력기관이라 할 수 있는 검찰의 조직 내 성폭력의 문제를 여성 검사가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자기 발언적 주체로서 성폭력의 피해자임을 고백한 사건은 최초였다. 사실 그동안 많은 여성들은 조직 내 성폭력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뭔가 잘못을 범했다는 착각 속에 갇혀 있곤 했다. 그러나, 서지현검사는 자신들이 고통을 당한 것은 ‘피해’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환기시켜주었다. 잘못은 가해자의 몫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리더십에 주는 도전은 무엇인가?

그 외에도 조직 내에서 혹은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합리함에 대해 사람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있다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대기업 오너 일가의 갑질에 대해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직원들, 고객의 갑질에 대해 맞고소로 응대하는 백화점 직원, 그리고 ‘저도 남의 집 귀한 자식입니다’라는 글귀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등이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 도처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은 조직화된 노동조합, 정당, 시민단체만이 아니라 각 개인들이 존엄한 주권자임에 대한 자기인식과 자기확신을 가지고 자기 발언적 주체되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침묵하지 않겠다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강렬한 자기 발언적 주체되기의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는 상대보다 더 큰 지위를 가진 조건위에서만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이 라는 패러다임에 종언이 고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즉 지위에 의한 리더십은그 유효기간이 종료되었으며, 종언이 내려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리더십의 본질적인 의미 : 관계 맺는 힘

 

그럼, 지위에 의한 리더십이 종언을 고했다면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팀에 대해 리더십이 ‘있다/없다’, 혹은 리더십이 ‘탁월하다/부족하다’라는 평가를 하는 근거는 리더십이란 단지 어떤 지위(position)1)나 역할 수행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힘’2) 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더십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리더가 어떤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힘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위로부터 힘이 나오기도 하지만, 모든 지위가 리더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탄핵의 위기 앞에서 대통령이라는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리더로서의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던 사례를 생각해보면, 지위와 힘은 가역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더의 힘으로서 리더십은 어떤 힘을 말하는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느 날 한 언론인에게 질문을 받게 된다. 지구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쟁과 폭력을 볼 때 과연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면서, ‘도대체 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는가?’라고 교황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온 것은 인간들 위에 폭력적으로 군림하기 위함도 아니며, 인간들로부터 숭배를 받기 위함도 아니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온 것은 인간들과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신이란 관계이다. 이 세상 도처에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과 폭력 속에 인간과 관계하는 신이 존재하는지 나도 의문이다.’고 말하였다. 교황의 핵심적인 이야기는 전쟁과 폭력이 있는 곳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정보다는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리더라고 평가받는, 그리고 최고의 리더십을 가진 존재라고 평가받는 신의 존재방식은 인간과의 관계맺음이며, 따라서 리더십이란 관계맺는 힘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서 리더십의 본질적인 의미를 ‘관계 맺는 힘’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3. ‘지위 힘(position-power)’과 ‘아레테힘(arete-power)’의 차이

리더십의 본질적인 의미를 관계맺는 힘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관리자(manager)와 리더(leader)의 차이를 다시 한번 환기할 필요가 있다. 지위에 의한 리더십의 종언이란 곧 관리자의 시대와 단절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리더십 이론가와 실천가들은 오랫동안 관리자와 리더, 관리의 힘과 리더십을 엄밀하게 분별하려고 애써왔다. 우선 관리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지위에 근거해서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즉 관리자는 ‘지위 힘(position power)’에 기반을 둔 힘의 주체인 것이다. 또한 관리자는 자신의 관할 범위 내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관할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승진(더 높은 지위를 확보함)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실질적인 급여가 늘어나지 않고 동결되더라도, 자신이 관할할 수 있는 예산과 인력의 범위가 늘어나는 것을 관리자는 선호하고 또한 열망한다. 이는 마치 국가주권을 영토주권으로 이해하던 패러다임과 연결되어 있다. 영토주권은 그야말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 주권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는 것을 국가의 존재이유로 보았던 것이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국가주권에 대한 국제사회 간 상호인정 협약을 통해 영토주권보다 국민주권(인민주권)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지만, 1,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전 세계는 지속적으로 영토주권을 확보하고 확장하기 위한 국지적 전쟁과 갈등에 처해 있는 형국이다. 관리자는 이와 같이 자신이 관할하는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관리자는 자신의 지위가 상대보다 우월할 경우 자신이 비록 사람들과 같은 조직이나 사회적 조건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을 상대와는 구별해서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즉 함께 하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관계맺는 힘이 궁핍하거나 부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관리자는 자기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관리자가 아무리 높은 지위와 권한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 자체가 아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권한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어떤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된다. 임기를 가진 지위든, 정년을 가진 지위든 모든 지위와 권한은 반드시 그것이 종결되는 시점이 있다. 지위는 관리자 자신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리더는 관리자와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이다. 관리자는 ‘지위 힘(position power)’에 기반을 두어서 힘을 발휘하는 반면 리더는 관계맺는 힘으로서 ‘아레테 힘(arete power)’을 가진 사람이다. 아레테 힘이란 ‘리더가 전면적으로 자기화한 힘으로서, 구조화된 힘이며, 구조화시키는 힘이다. 리더 자신에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다. 아레테 힘은 ‘타고나는 순수 내재적인 힘과 학습과 실천의 습을 통해 생성되고 강화되는 힘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관리자가 현상 속에 드러난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갖는 반면, 리더는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행위자에 관심을 갖는다. 즉 행위자 자신이 전면적으로 자기화된 힘을 갖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행위자가 내면화된 힘을 갖고 있지 않다면, 현실에 드러나는 행위는 대단히 불안정할 것이며, 주변 상황과 조건에 너무 쉽게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아레테 힘을 자기화한 리더, 아레테 힘을 자기화하고자 하는 리더는 지위 힘에 기반을 둔 관리자와 분명 다른 비전과 지향을 추구한다. 리더는 함께 하는 사람들 각자의 고유성과 특이성에 관심을 가지며,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리더는 전체를 단순히 개인들의 합으로 보는 가역적인 패러다임으로 분리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 리더는 함께 하는 사람들 전체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되,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돌보는 것이 곧 전체 조직이나 사회의 부분을 돌보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즉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전체의 부분을 돌보는 것임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또한 리더는 사람들을 지위로 강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공명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되기까지 실천적 소통과 공감적 소통을 지속한다. 따라서 리더는 비지배 자유의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더는 자신의 힘이 조직적·사회적 지위에 한정되지 않도록 늘 깨어서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다. 리더는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창출해야 할 탁월한 사업의 성과와 한 사람 한 사람이 감히 범할 수 없이 높고 엄숙한 존엄한 주체임이 통합적으로 추구되는 것을 지향한다. 즉 사업의 성과와 주체의 존엄은 리더가 책임을 져야할 통합적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리더는 이러한 힘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도록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표 1>은 리더가 전면적으로 자기화하고 있는 아레테 힘과 관리자가 기술·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지위 힘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조직과 사회의 일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지위 힘에 기반을 둔 관리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위 힘에 기반을 둔 관리를 넘어서, 아레테 힘에 기반을 둔 리더와 리더십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이 국민주권과 시민주권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와 리더십의 본질적인 의미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4. 자기관계의 힘 : 자기인식과 자기돌봄의 힘

그럼, 리더로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지위 힘에 기반을 둔 관리자에 머무르지 않고 아레테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한 리더되기를 할 수 있는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아레테 힘을 자기화하기 위한 기술과 방법을 자기수양 혹은 ‘자기관계의 힘(소프로쉬네.sophrosyne)’으로 명명했다. 소프로쉬네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레테의 힘을 강화하는 길이며, 그것이 곧 리더되기의 핵심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키케로, 에픽테토스와 니체, 하이데거와 푸코에 이르기까지 ‘리더되기는 곧 자기 자신되기(becoming a leader is becoming myself)’3) 의 다름 아니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자기인식과 자기돌봄의 실천적 의미란 곧 자기 자신되김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리더되기의 다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예속되거나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캐묻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예속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지혜가 없고,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예속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무지함을 갖고 있는 것인가? 요리를 만드는 일인가? 옷을 만드는 일인가?

가구를 만드는 일인가? 어쩌면 이러한 일들에 능숙한 앎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예속된 삶을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의 본질에 대한 캐물음4)을 통해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자기 자신의 삶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며, 알려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본래적인

자기 자신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본질적인 자기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야하는 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인식(그노티세아우톤.ghnoti seauton)’과 ‘자기돌봄(에피메레이아 헤아우톤.ephimeleia heauton)’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자기인식과 자기돌봄으로써 자기 물음을 통한 자기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5)

니체도 일생을 통해 어떻게 한 사람이 온전하고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다. ‘우리에게는 수치심의 예민함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삶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삶인 것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 이게 우리의 과제’6) 임을 강조하면서, ‘당신은 반드시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하며,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관계의 힘은 자기인식의 힘과 자기돌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자기인식의 힘

자기관계의 힘을 내면화한 리더는 자기인식의 힘을 가진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자기인식(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의 의미는 단순히 내가 아는게 무엇이고, 내가 모르는게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주어진 문제를 탁월하게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본질적인 문제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리더의 중요한 역할임을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럼 이 모든 게 아니라면 무엇이 자기인식의 힘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레테 힘으로 추구하는 조직과 사회의 비전과 목표를 탁월하게 성취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지위 힘으로 관리하지 않고 감히 범할 수 없는 높고 엄숙한 존엄한 존재로 관계하면서 주체의 존엄을 손상시키지 않는 리더되기가 ‘본래적인 자기 자신의 삶인지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회피하지 않고 선택하며 살아갈 삶인지, 다시 태어나도 외면하지 않고 나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삶인지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앎의 힘 정도에 따라 자기인식의 힘의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인식의 힘은 ‘있다/없다’의 차원이 아니라 ‘크다/적다’와 같이 정도(degree)의 차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인식의 힘이 있는 리더는 어떻게 하면 탁월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 실행방법과 전략에 대한 앎과는 다른 앎이며,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잘 통솔하여 이끌 수 있는 방법과 기술에 대한 앎과는 다른 앎이다. 그것은 ‘사업의 성과’와 ‘주체의 존엄’을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그러한 리더의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삶인지,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자기 자신을 살아가는 삶인지를 아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자기돌봄의 힘

자기관계 힘의 두 번째는 자기돌봄의 힘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기돌봄(에피메레이아 헤아우톤.ephimeleia heaution)의 의미는 ‘~을 위한’, 혹은 ‘~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나 소중한 관계의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자체를 돌보는 것을 이야기한다. 리더로서의 지금 이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명예롭다고 인정받거나, 자기 자신에게 대단한 성취를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삶인지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리더로서의 지금 이 삶이 본래적인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캐물음이 바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돌봄을 가끔, 혹은 여유가 있을 때만이 아니라 언제 어떤 순간 속에서도 삶의 결정적인 고통의 순간에서도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역량이 바로 자기돌봄의 힘인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한 주간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한 해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자기돌봄을 한다. 맛있는 것을 먹음으로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며, 어떤 사람들은 쇼핑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또 어떤 사람들은 편안한 친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눔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긴 시간 잠을 자는 것을 통해 쉼을 얻곤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자기돌봄의 힘만으로 우리는 리더십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자기돌봄의 힘이란 자기인식의 힘을 상실하지 않도록 되풀이 되는 날마다의 일상에서 자기를 돌보는 것이다. 리더로서의 삶이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자기 자신의 삶인지를 캐묻는 것이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성실하게 책임감을 갖고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수고하고 있는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삶인지에 대한 자기인식과 그러한 자기인식을 돌보는 자기돌봄의 힘이 없다면, 우리는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정당하는 마리오네트가 되든지 혹은 누군가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순종주체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자기돌봄의 힘을 가진 리더는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생각아래 순종하도록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자기 자신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그래서 사업의 성과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언제나 주체의 존엄을 잃지 않고 본래적인 자기 자신의 삶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리더들은 이러한 자기돌봄의 힘을 회복하고 생성하고 강화하기 위해, 하루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조직과 사회안에서 ‘자기 자신을 돌보기’, ‘자기 자신을 배려하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자기 자신에 은거하기’, ‘자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기’, ‘오직 자기 자신안에서만 즐거움을 추구하기’, ‘자기 자신과 더불어 지내기’, ‘자기자신과 친구되기’, ‘거룩함 속에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 안에 있기’, ‘자기 자신을 치료하기’, ‘자기 자신을 경외하기’,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기 부재를 넘어 자기 현존을 경험하기’, ‘자기 결핍을 넘어 자기 충만을 추구하기’7) 등과 같은 일련의 실천들을 통해 자기돌봄의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돌봄의 힘이 부족한 리더가 이미 주권적 주체로서 존엄한 자기성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기돌봄을 힘을 내면화하도록 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이아몬드를 세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이다.

 

자기돌봄의 힘을 잘 보여준 많은 리더가 있지만, 왕중의 왕으로 불리던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대왕(Cyrus, BC 600~530)의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키루스대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귀족과 장군,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기돌봄의 의미에 대해서 당부하였다.

 

‘리더로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 용기 있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끝까지 용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용기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용기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전에 좋은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돌보기를 게을리 한다면 곧바로 퇴보하고 영혼의 힘은

약화되고 말 것이다. 승리를 얻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승리를 통해 얻은 것들을 계속

보존하는 것은 더 엄청난 일이다. 더 큰 용기와 영혼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각자의 본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일을 잘하고 있는 지 돌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의 품격과 덕을 유지하는 한에서 나는 리더로서 그런 사람들을 명예롭게

여기고 존경할 것이다.’8)

 

5. 올바른 타자관계의 힘

아레테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기관계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데, 리더의 힘으로서 아레테의 힘은 또한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작동하게 된다. 힘은 작동하는 힘이지,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힘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힘은 언제나 리더 자신과의 관계속에서,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작동하는 힘인 것이다. 따라서 아레테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올바른 타자관계의 힘(디카이오쉬네.dikaiosyne)’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우리는 관리자와 리더의 차이를 엄밀하게 캐물어 보았다. 리더십을 영웅적인 리더십, 카리스마 리더십, 탁월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끌어 가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을 넘어서 다른 의미의 리더십에 대해 캐묻고자 한다. 국민주권, 시민주권의 시대 리더는 자신이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리더가 원하는 것을 하게끔 만드는 힘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많은 리더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리더의 명령을 따라 목숨을 건 임무를 완수한 로완 중위(Rowan, 1857~1943)처럼 일하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리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실상은 사람들에게도 바람직하며, 그들을 성장시키고, 더 나은 상태로 변화시킨다 생각한다. 그러한 믿음 혹은 착각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대상(object)으로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리더의 생각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대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리더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대상화하게 되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는 리더에게 저항(objection)하는 주체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리더 자신이 증여한 선물이다. 조직과 사회안에서 지위와 힘이 있는 리더들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대상화 시켜 관리하려 하지만 그러한 예속화의 과정은 동시에 사람들을 저항과 전복의 주체로 전환시키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리더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감히 저항하고 전복을 시도하는 모든 움직임을 두려워하고 혐오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부덕한 리더십이 사람들을 바로 저항과 전복의 주체로 생성시키는 것이다. 저항적 주체의 생성은 관리와 예속의 열매이다. 주체의 존엄이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저항과 봉기, 전복적 존재로 자신을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들에겐 헌법 제1조 제2항에 따라, 그리고 헌법 제10조에 따라 순수 내재적인 힘으로서 그럴 힘을 이미 갖고 있다.

 

리더의 힘으로서 올바른 타자관계의 힘이란 곧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자기관계의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하도록 관계맺는 힘이다. 자기관계의 힘은 일종의 존재론적 공명(resonance.共鳴)9)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명은 ‘울려옴’에 대한 응답으로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화음의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관계의 힘이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 존재하게 하는 힘에 대한 문제라면, 올바른 타자관계의 힘은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론적 공명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 ‘혼자 노래를 부르거나(솔로)’, 리더가 ‘메인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백코러스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메인보컬과 백코러스)’이 아닌, 조직과 사회에서 리더와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각자의 고유하고 특이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화음을 창출하며 어우러지는 공명을 만드는 것(합창)’이다. 아레테 힘을 가진 리더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관계 맺는 사람들이 자기관계의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내면화하고 있는 이러한 자기관계의 힘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창출하게 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관계의 힘을 구비한 각 개인들이 조화를 이루어 공명을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타자관계의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한 리더십이다.

 

6. 리더십에 대한 4가지 패러다임

우리는 관계맺는 힘으로서 리더십이란 온전한 자기관계의 힘과 올바른 타자관계의 힘의 종합이라고 안내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리더십이 발휘되는 과정에서 4가지 패러다임의 차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① 목적론적 패러다임: 목적론적 패러다임을 가진 리더십은 조직의 공유된 공동의 비전과 사명을 추구하도록 힘을 발휘하는 것이 리더십의 본질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조직의 모든 활동은 조직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한에서 어느 정도의 불협화음이나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② 절차론적 패러다임: 절차론적 패러다임을 가진 리더십은 목적론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접근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의 비전과 사명을 정렬된 성과를 탁월하게 창출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합법적이고 정당한 법적·제도적 규정과 절차를 공정하게 따르지 않는다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의 목적이 아무리 고결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할지라도, 조직의 모든 활동은 공정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③ 공리주의적 패러다임: 공리주의적 패러다임을 가진 리더십은 절차론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접근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의 목적이 고결하고 가치가 있으며, 조직의 모든 활동 또한 법적·제도적 절차를 공정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정작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들 각자가 업무를 통해 자기 효용과 만족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조직의 목적과 절차뿐만 아니라, 조직의 성과가 더불어 함께 하는 조직의 모든 주체들에게 만족할 만한 자기 효용과 만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④ 비판적 패러다임: 비판적 패러다임을 가진 리더십은 공리주의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접근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의 목적이 고결하고 가치가 있으며, 조직의 모든 활동 또한 법적·제도적 절차를 공정하게 수행하고 있고,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들 각자가 자기 효용과 만족을 경험하면 그러면 되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을 바람직한 가치라고 여기는 리더십 패러다임이다. 비판적 패러다임은 인권감수성, 생태감수성, 젠더감수성, 본질감수성을 통합적으로 지향하는 리더십이다. 우선 인간 주체를 생명주체로 본다. 단순히 생명을 가지 살아 있는 생물체가 아니라 생태적 조화를 추구하는 생명주체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 관점에서 리더십에 대한 물음은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와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무용 가구를 생산·판매하는 미국의 허먼밀러(hermanmiller)10)는 모든 제품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생산하고 있으며(의자와 책상 뿐만 아니라모든 포장지 조차도 100% 재활용될 수 있도록 생산함), 노동자들의 생명안전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으면서 미국의 제조업 평균 산업재해율보다 현저히 낮은 사고율을 갖고 있으며, 생산공장의 거의 모든 전기를 친환경발전을 통해 조달하고 있다(2020년까지 업무와 생산과정의 모든 전기의 100%를 친환경발전을 통해 공급할 예정임). 아울러, 인권 감수성, 젠더 감수성, 본질 감수성에 대한 물음 속에서 ‘지금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이 사람들과 이런 일을 계속 수행해도 괜찮은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캐물음(물음의 n승. 물음! )을 수행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리더십 패러다임이다. 특히 비판적 패러다임의 리더십은 조직과 더불어 함께 하는 모든 내·외부 실천주체를 단지 자기 효용만을 충족하면 되는 유아론적 주체로 보지 않는다. 모든 실천주체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되거나 배제될 수 없는 ‘고유하고 특이성(singularity)’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더불어 함께 하는 타자와 공동으로 존재하는 ‘공동-내-존재(public-common being)’로 자신을 인식한다. 따라서 비판적 패러다임의 리더십은 주체를 유아론적 주체(단수성)가 아니라 고유성과 특이성을 가진 ‘공동-내-존재’(복수성)로 보는 것을 바람직한 가치로 생각한다.

 

7. 리더십에 대한 3가지 실천 모델

우리는 리더는 관리자와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이며, 관리자는 ‘지위 힘(position power)’에 기반을 두어서 힘을 발휘하는 반면 리더는 관계맺는 힘으로서 ‘아레테 힘(arete power)’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리더십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는 리더십을 실천하는 3가지 모델을 분류해보고자 한다. ① 행위자 리더십 모델은 ‘사람을 이끄는 역량을 갖춘 개인’을 리더로 보는 모델이다.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 리더는 업무 장악력과 카리스마를 갖추거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위 해야 하며, 보상과 처벌로 거래를 통해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리더 자신의 진정성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며, 때로는 아래에서 섬기는 모습을 선행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임팩트 있는 문제해결을 위한 변혁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탁월한 리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바로 그 한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행위자 리더십 모델에서 리더십의 주체는 리더 자신이다. 카리스마 리더십, 상황 리더십, 거래적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 진정성 리더십 등의 이름으로 설명된다.

② 촉진자 리더십 모델은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자극을 주는 역량을 갖춘 개인’을 리더로 보는 모델이다. 리더의 탁월함으로 앞에서 이끌거나, 뒤에서 미는 것과는 다른 역할로서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는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정자, 지휘자, 긍정적인 격려자, 임파워먼트를 강화하는 코치로서의 리더역할을 요구한다. 이러한 촉진자로서 리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바로 그 한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기에 촉진자 리더십 모델에서도 리더십의 주체는 리더 자신이다. 지휘자 리더십, 조정자 리더십, 임파워먼트 리더십, 코칭 리더십 등의 이름으로 설명된다.

③ 협력자 리더십 모델은 행위자이든, 촉진자이든 탁월한 개인을 리더로 보는 접근과는 다르다. 협력자 모델은 협동하는 팀 전체가 리더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인식하며, 협동을 통해서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협동, 공유, 공감, 소통 등은 협력 모델을 설명하는 핵심가치이다. 앞에서 이끌거나, 뒤에서 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파트너로서 수평적인 관계속에서 언제나 실천적 소통을 통해 집단적 의사결정을 도출하는 리더십 모델이다. 협력자 모델은 탁월한 개인 리더를 세우거나, 훈련시키는 것을 넘어서, 각 개인들이 협동을 통해서만 본래적인 자기 자신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런 개인들의 협동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협력자 리더십 모델에서는 모든 주체들이 리더십의 주체가 되며, 리더없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지향한다. 소위 숙의 리더십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협력자 리더십 모델이 온전하게 실행되기 위해서는 협력에 참여하는 각 개인들이 어느 정도의 기본 역량(행위자 모델이나 촉진자 모델의 리더 역량)을 구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시적이고 단기적으로는 각 개인의 기본역량이 부족해도, 협동하는 팀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만,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역량에 대한(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안에 전면적으로 자기화한 힘으로서) 자기물음과 자기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협력자 리더십 모델은 팀 리더십, 협동 리더십, 협력 리더십, 클라우드 리더십, 어셈블리 리더십 등의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8. 나가는 말 : 숙고하는 리더를 넘어 숙의 리더십으로

관계맺음의 힘을 내면화하기를 원하는 리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우월적인 경험과 지식, 안목을 토대로 ‘숙고하는 리더되기’를 넘어서야 한다. 리더는 분명 어떤 힘을 가진 사람이고, 그 힘은 조직과 사회가 직면한 본질적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힘이어야 한다. 아울러 리더의 힘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주체의 존엄을 손상당하지 않도록, 자괴감과 모멸감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힘이어야 한다. 그래서 리더들은 더욱 더 자신의 숙고하는 힘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리더 자신의 숙고하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 비록 리더가 모든 문제들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고,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예측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 각자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고, 전체 인류에게 미칠 영향까지도 충분하게 고려하고 숙고한다고 할지라도 - 함께 하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맥락에서 숙의 리더십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위해 창조되어야 할 본질적인 과제를 생성해가는 과정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숙의과정을 밟는 것이다.

숙의 리더십(deliberative leadership)은 탁월한 개인을 리더로 보는 접근과는 다르다. 숙의 리더십은 함께 하는 사람들 혹은 중요하게 협력하는 팀 전체가 리더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인식하며, 숙의적 협력을 통해서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협동, 공유, 공감, 소통, 환대, 공명 등은 숙의 리더십을 설명하는 핵심가치이다. 앞에서 이끌거나, 뒤에서 미는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협력자로서 수평적인 관계속에서 언제나 실천적 소통을 통해 집단적 의사결정을 도출하는 리더십인 것이다. 숙의 리더십은 탁월한 개인 리더에 초점을 두는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 각자가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본래적인 자기 자신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런 개인들의 협력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숙의 리더십은 모든 주체들이 리더십의 주체가 되며, 리더없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지향한다. 리더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는 있지만, 그 한사람의 힘에 의해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협력하는 전체가 숙의과정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위 힘에 기반한 관리자도 한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격려하고 지지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조직의 성장과 연관해서만 유효한 것이다. 조직은 영속적이고 개인은 흘러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개인은 영속적인 조직의 중간에 승차했다, 중간에 하차하는 부속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자기 선택, 자기 결정, 자기 주도성으로 업무를 하면 정말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인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 선택, 자기 결정에 의한 주체되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선택, 자기 결정에 의한 주체되기가 사실상은 예속된 주체로 자신을 주체화할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서 경계하자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런 주체를 성과주체11)로 부르고 있다. 숙의 리더십은 조직과 사회의 목표나 성과를 위해 개인을 도구화하거나 수단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인을 위해 조직과 사회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조직과 사회, 개인은 상호공속적이고 상호책임짐의 관계속에서 상호공명을 지향하는 관계맺음의 연결망에 속해 있음을 받아들인다. 숙의 리더십은 함께 하는 사람들 각자는 타자와 더불어서만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몫을 추구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며,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고유하고 특이한 존재의 몫을 향유할 수 있도록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공동의 몫인 자기 몫으로, 즉 공동의 몫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국민주권, 시민주권 시대의 리더는 자신과 함께 일하며 협력하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지식적으로, 자신이 가진 지위와 힘에 비해 열등하다고 해서 통제하고 지배하거나 혹은 관리하려는 접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공유하였다. 조직에서 사회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미 주체의 존엄에 대한 자기인식과 자기확신을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에 관계맺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관계맺음의 힘이 리더십의 본질적인 의미로서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리더로서 우리는 관계맺음의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하기 위한 자기실천의 길을 담대하게 나서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자치의정> 2018.9~10월호에 게제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