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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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근대건축.jpg | 조회수 | 1,370 |
원주에서 찾은 "K-모더니즘" - 6.25 전쟁 이후 원주 중앙동 근대 건축 이야기 2010년대, 특정한 장소에서나 접속하던 인터넷이 언제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시대로 바뀌었다. 길 거리에는 고개를 숙인 채 납작한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모르는 길을 묻는 사람들이 줄었다. 납작한 화면에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부터 가고자 하는 장소까지 가는 방법과, 곧 도착 할 버스 시간 같은 정보들로 가득했고 실제 장소 모습을 촬영하여 만든 입체 지도 서비스도 제공했 다. 그때 나는 ‘임시’ 서울 시민이었고 늘 화면 속 서울 지도를 들여다보며 서울 곳곳을 관람했다.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gallery)였고 화면 속 지도와 검색 기능은 도슨트(Docent)였다. 특 히 서울의 건축물은 끝없이 이어지는 오브제(objet)여서 관람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높다가 낮 아지고 튀어나오다가 납작해지고 이어지다 끊어지는 수많은 건축물을 보며 서울에 쌓인 시간을 생 각했다. 서울은 여러 개의 층을 가진 도시다. 경복궁 같은 전통 양식에서 덕수궁 석조전, 서울시립 미술관 서소문관 같은 근대 양식, 박공지붕과 붉은색 다세대 주택, 수많은 판상형·탑형 아파트 같 은 현대 양식이 한데 섞여 있다. 2021년, 서울을 떠나 다시 원주에서 생활한 지 4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사이 도시를 갤러리로 보는 방식에도 휴식기가 찾아왔다. 원주는 서울과 비교하면 단조롭고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기에 도 시 관람객이 될 필요가 없었다. 호젓한 중소도시의 삶이 점점 익숙해질 무렵 중앙동 강원감영 입구 옆에 있는 두 개의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전통 양식을 가진 강원감영 입구와 전통과 현대 사이에 있을 것 같은 건축물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마치 “날 좀 보소!” 했다. 나는 다시 도시 갤러리 를 둘러보는 관람객이 되고 싶었고 원주 구도심에 쌓인 시간을 들춰보기로 했다.
6.25전쟁 이후 원일로, 중앙로, 평원로
지금의 강원도청과 같은 강원감영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약 500년간 원주에 자리했다. 이후 1896년 지방 제도 개편 때 강원감영을 춘천으로 옮겨, 지금에 이른다. 그사이 원주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전쟁을 겪으며 원주 시내 곳곳이 파괴된다. 이때 미군 지원을 받아 원주역 앞과 이를 잇는 중앙동 시가지를 재정비해 지금의 시 골격이 만들어진다. 원주 시민에게 익숙 한 A도로, B도로, C도로 명칭도 이때 만들어진다. 지금은 순서대로 원일로, 중앙로, 평원로로 불린 다. 시내 근처에는 1군사령부를 비롯한 예하 부대가 들어서 ‘군사도시’의 모습을 갖춘다. 지금의 중앙동 지하상가 근처 원주 보건소 터에 군인극장까지 있었다. 1990년대 이후 구곡택지, 무실택지가 개발되기 전까지 원주의 중심은 중앙시장 일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단관극장인 시공관, 원주극장, 문화극장이 평원로에 띄엄띄엄 자리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아카데미극장은 이미 오래전에 영화관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은 보존 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으려 노력 중이다. 단관극장 말고 도 중앙동 곳곳에서 예스러운 건축물 많이 볼 수 있다. 원일로 쪽 강원감영 입구 옆에 1955년에 지어진 (구)자혜의원, (구)엘칸토가 평원로에는 1960년에 문을 연 (구)금성호텔&금성탕 건물이 있다. KBS사거리 근처 골목엔 1969년에 만든 (현)나다 갤러리가 있다. 그 건물에서 “옛날”이 느껴지는 이유 전통 목조 건축물이자 단층인 강원감영은 주변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다층 건물과 시각적으로 확 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강원감영 입구 옆에 자리한 자혜의원과 엘칸토 건물은 주변에 철근콘 크리트 건물과 외형으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주변 건물처럼 다층에, 여러 개의 창문이 있 고 외벽은 콘크리트이다. 하지만 어딘가 ‘옛날’ 느낌이 난다. ㄴ자가 180도로 엎어진 것 같은 평면 은 코너와 잘 들어맞는다. 건물 정중앙에 있는 주 출입구를 기준으로 입면은 대칭을 이룬다. 가로로 긴 창 대신 세로로 긴 창은 요즘 보기 힘든 오르내리창이다. 평평한 외벽에는 코린트 양식을 따라한 듯한 네 개의 하얀 기둥이 있다. 자혜의원 정면에서 왼쪽에 있는 엘칸토 건물의 외관도 자혜의 원만큼이나 개성이 넘친다. 주출입구는 오른쪽에 있고 세로형 창문이 일정한 간격을 구성한다. 창 문과 창문 사이에는 돌출형 구조물이 있어 입면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창문과 돌출형 구조물은 십자 모양으로 만나 격자를 이룬다. 격자는 아주 단순한 기술로 단조로운 외관에 음영을 얻게 하고 그 자신이 전체 비례의 감각을 돕는다. 평원로에 있는 금성호텔&금성탕 외관도 비슷하 다. 차이가 있다면 창문 위아래에 가로 형태의 인방보(창문 틀 상하부를 보강하는 보)가 있다. 1960 년대 이전에 만든 건물 외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격자 조형은 당시의 사회, 경제 상황을 반영한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거치며 사회는 혼란스럽고 경제는 암울하며 일제가 빠진 지식과 기술은 부족했다. 격자 조형은 단순한 기술로 만들 수 있는 편안하고도 경제적인 건축 기술이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명쾌한 미감도 있다. 1970년에 종로 청계천변에 커튼월 공법을 적용 한 삼일빌딩이 등장하기 전까지, 격자 조형은 한국 건축물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조형 기술이었다. 앞서 언급한 건물들로부터 “옛날” 느낌이 드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원주에서 발견한 르코르뷔지에 “건축 5원칙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파사드 ◦가로로 긴 창” 20세기 최고의 모더니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 1887-1965)가 제창한 ‘건축 5원칙’ 이다. 이를 바탕으로 1929년에 프랑스에서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를 만든다. KBS사거리 근 처 성지병원이 있는 골목에도 빌라 사보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건물이 있다. 가로로 긴 창과 하얀 외관이 비슷하다. 아쉽게도 필로티와 옥상정원은 없다. 1969년에 지어 지금은 갤러리, 건축사무소 로 활용 중인 나다 갤러리는 앞서 언급한 자혜의원, 엘칸토, 금성호텔&금성탕 건물과는 다른 조형 미를 보여준다. 특히 2층 파사드 전체를 덮은 가로로 긴 창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이다. 지금은 한 국 사람들 대다수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건축 공법이지만, 빌라 사보아가 만들어진 192~30년대만 하더라도 혁명에 가까웠다. 이전까지는 건물을 지을 때 바닥과 천장 사이 를 지탱하기 위해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어 해결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당시 신재료인 철근과 콘크 리트로 벽 대신 기둥을 세워 바닥과 천장을 고정한다. 이제 더는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 필요가 없 다. 벽 대신 여러 개의 창을 내어도 층을 쌓을 수 있다. 벽의 역할이 줄어들며 평면과 파사드도 이 전보다 더 자유로워진다. 나다 갤러리 파사드에서 빌라 사보아를 떠올려 르코르뷔지에까지 닿았지 만, 사실은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에는 르코르뷔지에가 숨어있다. 한국인이 가장 열광하 는 아파트는 그가 말년에 설계한 유니테 다비다시옹(Unite d'Habitation)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는 현대 건축의 기초인 '철근콘크리트'와 '기하학', '표준화'를 제시했다.
살아남은 건축물이 던지는 메시지 르코르뷔지에로 대표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유럽과 미국 등에서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지만 한국 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이마저도 6.25 전쟁 후 혼란한 사회와 낮은 기술 력으로 ’어디에서 본 것들을 마구 섞다’가 일본이나 유럽, 미국 사회에서 정식으로 건축 교육 받은 한국 건축가들의 등장으로 ‘국제 스타일의 아류들을 채워’가며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진다. 1970년 에 서울 종로 청계천에 김중업이 지은 삼일빌딩은 한국 최초의 고층 빌딩이자 커튼월 공법으로 만 든 1970년대의 진보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하지만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 1969)가 1958년에 지은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과 형태와 공법이 매우 비슷하다. 1970년대에 이르러 국내 철강 생산이 가능해지고 건축 기술 수 준이 올라가며 오늘날의 한국 도시를 완성한다. ‘그때 그 시절’ 을 살아남은 몇몇 건축물은 삼일빌딩처럼 여전히 주목받지만 대부분은 새로운 건물에 가려지거나 철거를 코앞에 두고 방치 중이다. 원주에 있는 오래된 건축물은 상황이 더 여의치 않다. 빠른 속도와 높은 이윤, 최대 효율이 미덕인 시대에 단지 몇 십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는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그 렇다고 철거가 답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여러 개의 건축물 양 식과 구조를 두고 당시 시대상과 같은 여러 가지 소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가 되면 멸한다. 건축물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불멸할 수 있다. 미래는 과거를 딛고 일어난다. 미래를 위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한때 원주의 중심 지였던 중앙동을 거닐며 생각에 빠져본다. 참고자료 최재석 <원주 근대건축을 찾아서>, 2018 박길룡 <한국 현대건축 평전>, 2015 임동근, 김중배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2015 글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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