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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는 어떻게 협동조합의 도시가 되었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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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일산동 구 지하상가에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의 설립·운영을 지원하고 교육하는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외지 사람들이 원주의 협동조합 정신을 배우기 위해 찾아옵니다. 사무실 옆 교육장에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무위당기념관과 가톨릭센터, 원동성당을 성지순례 하듯이 탐방을 하고, 한살림원주·노인생협·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같은 원주의 대표적인 협동조합을 견학하고 돌아갑니다. 이제 원주는 많은 사람에게 협동조합운동의 도시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원주에는 80여 개의 협동조합과 29개의 사회적기업, 8개의 마을기업이 있습니다. 주민 5명 중 한 명이 협동조합에 가입돼 있을 만큼 협동조합이 담고 있는 정신이 원주시민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주는 어떻게 협동조합의 도시가 되었을까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의 만남

1965년에 천주교의 총 본산인 로마 바티칸에서는 가톨릭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타진하고, 교회를 현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바오로
6세는 구제해야 할 것은 인간이며 개혁해야 할 것은 인간사회라고 밝히면서, “전 세계의 주교들이 그들 나라의 교구로 돌아가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회상에서 벗어나 각자의 교구가 속해있는 지역과 국가가 직면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촉구했습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한국 천주교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바티칸공회가 끝나고 교황청에서 강원도를 담당하는 춘천교구를 나눠서 강원도 남쪽에 원주교구를 설정하게 됩니다. 원주교구 관할 지역은 10만밖에 되지 않는 원주시와 영월, 삼척 등 산악지역과 탄광지역, 농어촌지역 정도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교통의 오지이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그야말로 매우 열악한 지역이었습니다.


1965
3, 교황은 한국에서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사목헌장을 실천할 신부로 마흔네 살의 젊은 신부 지학순 주교를 초대 원주교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해 6월 원동성당에서 원주교구장에 착좌한 지학순 주교는 사목지침을 빛이 되라!’로 정하고 교회가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세상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야 한다는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학순 주교의 관심은 원주교구 안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주민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 지역이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고, 특히 농촌과 탄광지역 주민들이 고리채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원주교구장으로 부임하기 전 부산 초당동 주임신부로 있을 때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학순 주교에게는 자신의 뜻을 함께 할 동지가 필요했습니다
. 부임하고 얼마 뒤 지역 유지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바티칸 공회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개방된 성당을 운영하고 싶은데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분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모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추천했습니다.

그 당시 장일순 선생은 감옥에 다녀와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사회활동을 제약받고 있었습니다. 1965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성학교 이사장도 그만두고 집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두 분은 평생의 지기로 협동조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다가 지학순 주교는 1993년에, 무위당 선생은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생전에 두 분은 서로 짝사랑하듯이 가까운 사이로 지냈는데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 선생이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을 원주교구 사도회장에 임명했고, 원주교구를 배경으로 사회 전반적인 면에서 운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의 기반을 다지다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 선생과 의논해 1966년에 원동성당 안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무위당 선생님이 이사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필두로 황지신협, 문막신협, 단구동신협, 삼척신협이 잇달아 설립됩니다. 그런데 신협운동 경험이 너무 없다 보니까 잘 진척되지 않아 서울의 신협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교육을 받으며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은 협동조합운동은 지속적인 교육과 지도가 뒷받침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동교동에 있는 협동교육원에 무위당 선생의 둘째 동생인 장상순 씨를 서울 주재원으로 파견해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원주에 돌아온 장상순씨는 19699월에 지학순 주교가 세운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주 11시간씩 협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 학생과 교직원이 의무적으로 협동조합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이듬해에 진광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협동조합입니다. 이곳에서 여·수신 업무뿐만 아니라 매점을 운영하고 교과서와 교복을 공동구매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것이 커져서 식당까지 직영해 친환경 식단을 학생과 교직원에게 싼 가격으로 제공했습니다.


그 무렵 진광학교에 훗날 무위당 선생과 함께
한살림을 만든 박재일 선생이 영어 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장상순과 박재일 선생은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원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협동조직의 기반이 차근차근 다져지게 됩니다.

1971년은 가톨릭 신자 중심으로 운영돼온 원동 성당의 협동조합이 원주시민을 대상으로 한 협동조합 조직으로 탄생한 해입니다. 원주 가톨릭센터 안에 소시민들과 시장의 난전에서 장사하는 상인을 상대로 밝음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었습니다. 이 신용협동조합은 10년 후 원주 시내로 나가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에 이른 밝음신협입니다.


현재 원주시 인구
36만 명 중 원주시민의 44%15만 명이 신용협동조합원입니다. 신협을 통해 지금까지 약 1조 원이 자산이 형성되어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1972
8월에 남한강 유역의 집중폭우로 원주교구 산하 탄광 지대와 제천, 단양지역 등 13개 시군이 크게 피해를 보았습니다. 원주교구에서 집계한 사망자는 66, 부상자가 330, 수재민 수는 145천 명에 달했습니다.

원주교구는 세계 각국의 가톨릭 구호기관에 연대를 호소했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독일에 가서 독일 선교재단에게 수해복구자금을 요청해 35천만 원을 지원받았습니다. 당시 이 돈은 군() 단위의 1년 재정과 맘먹는 큰돈이었습니다. 국제기구의 지원을 계기로 원주교구는 종교, 행정기관, 교육계, 언론계 대표 등을 망라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여 재해복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은 이 돈을 수재민에게 거저 나눠주면 의타심만 조장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 두 사람은 조건 없는 구호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노력의 대가로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피해가 심한 수해지구 21개 부락을 선정해 긴급 구호식량 보조사업, 전답복구 등 생산기반 조성사업, 부락개발사업, 지역사회 개발사업으로 구분해 단계적으로 구호사업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이 가운데 중요한 비중을 갖고 추진한 사업이 협동조합을 통한 부락개발사업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농촌과 광산촌에 산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리채로 시달리는 탄광촌에 구판장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협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의 명을 받고 태백 광산에 파견돼 10년 넘게 광산신용협동조합운동에 헌신한 이경국 선생(무위당만인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원주 시내에서 건축자재 장사를 잘하고 있는 저를 무위당 선생님이 주교관으로 와달라고 부르셔서 가보니까 지 주교님과 함께 계셨어요. 무위당 선생님이 경국아, 너 사람 낚는 어부 한번 해봐라. 광산에 가서 광부들 모시고 일 좀 해다오. 제가 누구 명인데 거절하겠어요. 한 달 뒤 저는 장사를 접고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광산으로 갔어요. 그때 태백탄전에 20만 명의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3년 동안 광부들을 설득해서 협동조합 교육을 하고, 신용협동조합 15군데 만들고, 광산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생필품을 싼값에 공급할 수 있는 소비조합 50군데를 만들었어요. 광산에 지학순 주교님이 건물을 크게 지어주셔서 소비자협동조합 사무실을 거기다 두고 1층에는 광부들이 사용할 생필품을 잔뜩 싸놓고 15년 협동조합운동을 했습니다.”

 

생명운동과 한실림운동

무위당 선생은 1970년대 중반까지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막후에서 지원했습니다. 선생은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지금까지의 민주화운동이 투쟁 일변도의 운동에 머물러 있을 뿐 전 지구적 문제인 생명 존중, 자연 및 환경 보전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면서 생명운동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우리가 다 죽어도 후손에게 남겨줘야 하는 것이 이다. 지금 농약으로 산성화가 된 땅을 후손에게 남겨주는 것처럼 큰 죄는 없다. 이제부터는 땅을 살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 뒤 원주의 협동조합 지도자들과 함께 땅과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우리가 모두 소비해주겠다면서 원주시 공근면의 가톨릭 농민회원 10집을 모델로 유기농산물 계약재배를 시작했습니다. 화학비료 안 쓰고, 제초제도 안 쓰고, 땅에 자연 퇴비와 거름만 주고 땅 살리는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5
년 동안의 각고한 노력 끝에 성공한 땅 살리기 운동을 기초로 1986년에 무위당 휘하의 박재일 선생이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란 이름의 유기농 쌀가게를 차렸습니다. 이것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농산물 도농직거래 조합인 한살림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난해에 30돌을 맞은 한살림은 전국에 130개의 조합, 65만 세대를 조합원으로 둔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현재 원주에는 만 이천 세대의 한살림 조합원이 있고, 네 군데에 한살림 매장을 두고 있습니다.

한살림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농산물 직거래조직이지만 병들고 죽어가는 이 땅의 하늘과 흙과 물과 밥상을 살리자는 운동입니다. 생명의 원점인 밥상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무위당의 생명사상이 구현된 협동조합운동이며, 이 운동은 서울의 변방 강원도 원주의 선각자들에 의해 싹을 틔운 것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은
사람을 모시는 운동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두 분의 정신은 원주에 면면히 살아있습니다.

20097월에 협동조합 간의 활발한 연대를 통해 지역 주민의 삶과 경제를 이롭게 하고, 협동과 자치의 지역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가 창립됐습니다. 이곳에 원주지역의 30개 협동조합이 가입해 끈끈한 연대로